◎국책사업·중요기관장인사 결정등 막강한 힘 행사/6공때 4명… 개인특성따라 영향력 조금씩 차이도김종인 전청와대경제수석비서관이 노태우 전대통령 축재비리사건과 관련, 21일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음에 따라 청와대 경제수석의 위상 및 역할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경제수석은 경제정책 전반에 대해 대통령을 보좌하는 위치로, 가장 가까이서 수시로 대통령을 만나 이야기할 수 있어 급에 관계없이 경제정책에 관한 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마련이다. 경제수석은 경제부총리와 함께 경제팀의 두 축을 이루고 있지만 국책사업추진 중요기관장인사등의 의사결정에 있어서는 경제부총리를 능가하는 파워를 행사한다는게 정설이다.
특히 대통령의 경제지식이 적을수록 경제수석의 영향력이 더 강할 수밖에 없다. 5공때 김재익 경제수석은 사실상 「경제대통령」이나 마찬가지였다. 5, 6공시절의 일부 경제수석들이 「경제부통령」으로 불렸을 정도다.
6공시절의 경제수석은 박승(88년2월19일∼12월5일) 문희갑(88년12월5일∼90년3월18일) 김종인(90년3월18일∼92년3월31일) 이진설(92년3월31일∼93년2월24일)씨등 모두 4명. 6공 경제수석의 직급은 초대 박수석만 차관급이었고 문수석 김수석 이수석은 모두 장관급이었다. 문민정부들어 경제수석이 차관급으로 낮아졌다.
경제수석의 영향력은 막강하지만 개인적인 특성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났다. 중앙대교수출신의 박수석은 「정부간섭의 축소」가 평소 소신이었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박수석은 가능한한 앞에 나서지 않으려 했다. 그는 당시 민주화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의식했던지 경제수석은 대통령을 보좌하는데 머물러야지 행정부를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폈다.
문수석은 「문핏대」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강력한 추진력을 앞세워 경제현안들을 모두 챙기려 했다. 당시 조순 부총리와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경제비서실의 힘은 자연히 강해졌다. 주택 200만호건설은 문수석의 추진력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을 정도다.
김수석은 노씨 경제가정교사를 지내 신임이 두터웠다. 김수석은 평소 『대통령책임제에서는 경제정책의 최종책임 역시 대통령에게 있다』고 강조했던 만큼 소극적인 조정역할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5·8 부동산대책등으로 반재벌파로 알려졌기 때문에 노씨 비자금 조성과정에서 노씨와 재벌총수들과의 면담을 주선했거나 총수들이 낸 자금을 전달하는 단순역할등을 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지만 이처럼 막강한 위치에 있었던 만큼 의외로 상당히 깊이 관여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재임기간인 90년11월이후 100억원이상의 공공기관 발주공사가 20여건이 있었고 93년 동화은행 비자금사건과 관련해서는 당시 안영모 행장으로부터 2억1,000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6공 마지막 경제수석인 이수석은 직업관료 출신인데다 정권말기 「레임덕 현상」이 겹쳐 일을 벌이거나 챙기기보다는 말 그대로 비서의 역할에 머물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이상호 기자>이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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