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회에도 햇빛이 드는 곳과 그늘이 있다. 북한에도 사회주의 체제 이면에는 의리와 인정으로 굳게 맺어진 사회가 있다.고등중학교 시절 나는 우연한 계기로 뒷골목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평남 안주시에 근거를 둔 우리 조직은 「항쟁사건」으로 대립하는 조직들을 차례로 뒤엎어 전성기에는 약 200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선배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큰 나는 이 조직의 간부로 「백가」라는 별명을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 조직의 이름은 「바퀴파」였다. 튼튼한 차 바퀴를 빗댄 것으로, 큰 보스 밑에는 나를 중심으로 12명의 간부가 있었다. 우리들은 의리에 죽고살자며 왼팔에 도끼그림과 그 밑에 의리라는 두 글자를 문신으로 새겼다. 북한의 조직간부들 사이에서는 문신으로 의리를 다지는 것이 흔하다. 칼 무늬에 복수란 글자를 새긴 것도 있고, 사과에 화살을 박은 것, 뱀이나 태권도 그림등 갖가지 문신들이 그 조직의 징표가 된다.
안주시는 평양 다음가는 살기좋은 곳으로 소문나 있다. 「죽어도 평양에서 결혼한다」는 콧대높은 평양아가씨들도 안주남자라면 시집가기를 마다하지않을 정도다. 이곳에는 중공업공장과 기업들이 들어서 있고 전국의 장사꾼이 모인다. 우리들은 안주의 이면사회를 완전히 장악, 『안주의 낮은 사회주의가, 밤은 자본주의가 지배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조직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한 것은 아니다. 강도 소매치기 들치기 강간범등 흉악범 좀도둑과 정통파 깡패조직을 같이 보면 곤란하다. 우리는 안주시내에서 이같은 범죄는 하지 못하게 막았고, 그런 일이 발생하면 다른 지방으로 나가게 했다.
북한의 조직은 다른나라처럼 먹고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뒷골목의 우리들을 비판적으로 볼 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나름대로는 「강한자를 꺾고 약한자를 도우며 짧고 굵게 산다」는 신념을 가졌었다. 나 자신도 애국열사 집안 출신이며 대체로 북한의 조직원은 핵심계층 출신이 많다. 이같은 공통점 때문인지 우리와 안전부 보위부는 정기적인 상납은 물론, 정보교환과 검거자를 빼돌리는등의 거래관계가 있었다. 노동당과도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당은 이같은 신사협정을 파기, 93년 1월부터 9월까지 안주시에서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일으켜 조직은 파멸의 비운에 빠졌다.
나도 이해 5월 체포돼 3개월가량 조사를 받다가 선배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 체력을 회복한 다음 11월에 압록강을 건넜다. 이 과정에서 각지방의 조직 선후배들이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
지금 살고 있는 서울은 풍요롭고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대로 살 수가 있다. 수라장을 헤쳐 살아온 나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느낌이 있을 정도다. 우리조직에는 반정부 폭동을 주도한 동료, 재판소장의 눈을 찔러죽인 동료등 과격한 행동을 하다가 붙잡힌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공개처형된 이들을 손수 묻어줘야 했다. 자유롭고 풍요로운 사회에 살면서 먼저간 동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같다.
□백영길씨 약력
▲70년 9월5일 평안북도 운전군 출생
▲평안남도 안주시 남흥고 등중학교 졸업
▲철도 전문대(훈련소) 수료
▲남흥화학공장 사로청위 원장으로 근무중 안주시 범죄조직「바퀴파」핵심간 부로 활동
▲93년 5월 국가보위부에 체포당했다가 탈출
▲94년 3월11일 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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