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고문 앉아 각료·은행장인사에 입김/구체금액·납부시기까지 제시 거둬들여금진호 민자당의원이 노태우 전대통령 부정축재비리의 핵심고리라는 의혹이 점차 현실로 굳어지고 있다. 금의원이 2차 소환돼 장시간 추가조사를 받자 6공의 실세로 활동한 그에 대한 재계쪽의 비난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6공시절 경제각료와 은행장 인사에 결정적 지분을 갖고 있었고, 대형 국책사업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인사철만 되면 그의 주위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는 것이 재계의 평이다. 『노씨 부정축재비리의 거간꾼』이며 『건네지는 돈을 잘라먹기도 했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으며 『모일까지 얼마의 돈을 내라는 말까지 직접 들었노라』는 기업인까지 있다. 그가 「6공의 경제계 최대 실력자」였으며 「돈을 매개로 한 노씨와 기업인의 연결고리」라는 것이다.
금의원은 서울법대를 나와 62년 총무처에서 공직생활을 시작, 70년대에 상공부 동자부의 국장을 지냈다. 80년 신군부 집권과 동시에 국보위 상공분과위원장으로 기용돼 탄탄대로의 기틀을 다졌다. 이후 국무총리 비서실장과 상공부차관을 거쳐 83∼86년중 상공부장관을 지냈다. 2년10개월간 재임함으로써 현재까지 39명의 상공장관중 5번째로 장수했던 그는 재임중 상공부내에 확실한 인맥을 구축, 현재까지도 그의 영향력이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
그는 그러나 정작 손윗동서인 노씨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로는 무협고문이라는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 앉아 숨은 실력자로 활동했다.
재계쪽 발이 넓어 그의 출장길에는 내로라 하는 재계인사들이 대거 동행했으며 그가 설립한 국제무역경영연구원에는 업계 학계의 상당수 관계자들이 경쟁적으로 참여, 경제계의 실세임을 입증했다.
그가 경제계로부터 실세로 인정받게 된 것은 대통령과 동서이상의 인간관계임이 대내외에 인정됐기 때문. 특히 김옥숙씨와 금의원의 부인인 김정숙씨가 유난히 가까웠고 노씨도 처남인 김복동 의원 등 다른 친인척에 비해 금의원을 각별히 생각함으로써 그는 명실상부한 「청와대 식구」로 활동했다. 그는 해외출장을 다녀온후 공항에서 막바로 청와대로 달려갔다고 한다.
금의원은 6공기간중 잦았던 경제각료 임면의 주체였고 은행장의 연임여부도 말 한마디로 결정, 경제계 실세로의 위치를 충분히 활용했다. 상공부장관시절 맺은 기업과의 인연은 노씨의 부정축재에 활용됐다. 굵직굵직한 사업을 따느냐여부는 그의 말 한마디에 크게 좌우되었기때문에 기업들은 그를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때마다 보따리(뇌물)는 필수적이었다는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구체적으로 금액과 납부시기를 명기할 정도로 내놓고 거두어 들였다』고 귀띔했다.<이종재 기자>이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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