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 음악가 윤이상씨가 끝내 고향방문의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4일 베를린에서 타계했다. 그의 죽음은 조국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또 하나의 깊은 상처를 남겼다. 과연 그가 그런 상태로 유명을 달리해야만 했는지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다.윤씨는 음악적으로는 자랑스런 한국인이었다. 한국의 전통음악 정서를 세계화시킨 개척자이자 한국이 낳은 첫 세계적인 작곡가다. 한국의 전통음악적 요소와 서구의 현대 작곡기법을 조화시킨 5편의 교향곡과 오페라 「심청」 「나비의 꿈」등 1백50여편의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이처럼 현대 음악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그도 동베린 사건을 계기로 정치·사상적인 문제때문에 많은 불행을 맛보아야 했다. 그가 음악가로서 보다 이 문제로 더 고통을 당하고 유명해진 것은 우리 민족에게 분단의 쓰라림을 통감케 해준 하나의 상징이었다.
불행한 사건으로 고국을 등졌으면서도 그는 한시도 한국을 잊지 못했다. 한국사람을 만날 때마다 고향 통영 앞바다의 섬이름을 하나 하나 떠올리며 그리움을 호소했다. 고향방문은 하나의 집념이었는데 끝내 이를 이루지 못한채 한을 안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윤씨의 고국방문은 지난해 9월 국내에서 열린 「윤이상 음악제」를 계기로 그가 귀국을 희망하여 무르익다가 무산됐다. 마지막 단계에서 정부나 윤씨나 지난 날에 취한 서로의 태도와 활동에 대한 사과와 해명을 요구함으로써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지난해 12월에는 도쿄에 온 윤씨가 정치활동에서 손을 떼고 음악활동에만 전념하겠다고 마지막 귀국신호를 보냈으나 정부가 이를 외면했다. 이때의 심적 타격이 그의 병을 악화시켰다고 전해진다. 정부가 민족분단이 낳은 불행을 마무리한다는 차원에서 정치와 결별하겠다는 그를 포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길게 남는다.
윤씨의 귀국이 성사되었더라면 그것은 윤씨를 친북인사 아닌 위대한 한국인으로 세계에 자랑할 좋은 기회였다. 북한만의 윤씨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데 정부가 더 적극적이었어야 했다. 그는 『남한도 북한도 하나의 조국』이라 했지만 결국 남한도 북한도 조국이 아닌 영원한 실향민이 되어버린 것이 안타깝다.
이제라도 우리는 그를 포용하고 업적을 올바르게 평가해야 한다. 이미 우리는 그의 음악과는 화해했다. 그의 음악작품이 국내에서 공연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를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것은 음악적으로 커다란 업적을 남긴 윤씨를 한국인 음악가로서 세계에 보다 명확히 알릴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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