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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 쥐스킨트 「좀머씨 이야기」/임지선(요즘 읽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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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 쥐스킨트 「좀머씨 이야기」/임지선(요즘 읽은 책)

입력
1995.1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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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제발 그냥 놔두시오!” 생생한 절규/잊혀져간 보통사람들 발자취 생각케 해숲과 호수가 있는 작은 마을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다. 소년은 한 이상한 사람과 몇 번 마주치게 된다. 전쟁후 마을에 들어온 좀머라는 성을 가진 그 남자를 모르는 마을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정작 성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진 바 없는, 마을에서 철저하게 고립되어 사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잠잘 때를 빼고 하루종일 배낭을 멘채 큰 지팡이로 땅을 찍으며 걸어다니는 그를 두고, 밀폐공포증 환자일 것이라는 추측만이 온 마을에 퍼져 있을 뿐이다. 화창하던 날씨가 갑자기 바뀌어 돌풍이 불고 우박이 쏟아지던 어느 날이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이 칠흑같이 어두운 그 날도, 좀머씨는 비옷을 입고 급한 볼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폭우를 헤치며 걷고 있었다. 저러다가는 죽고 말 것이라는 걱정을 하며, 소년의 아버지는 좀머씨에게 자신의 차로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간곡히 권유했다.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지팡이로 땅을 치며 절망적인 몸짓으로 토해낸 이 외침이 소년이 유일하게 들은 좀머씨의 말이었다.

늙고 괴팍한 피아노선생님께 심한 모욕을 받고 죽음을 생각하며 큰 나무 위로 올라간 날, 소년은 다시 한 번 좀머씨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나무 아래까지 온 좀머씨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며 누군가에게 쫓기듯 다시 멀어져갔다. 소년이 좀머씨를 마지막으로 보게 된 것은 몇년후 호숫가에서였다.

좀머씨는 하도 걸어다녀 힘줄이 불거져나온 두 다리를 물에 담그고 서 있었다. 그러더니 곧 호수 가운데로 걸어들어가 결국 좀머씨의 밀짚모자만이 물 위에 뜨고,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소년은 좀머씨의 행동을 막는다거나, 소리쳐 주위사람들을 부를 생각도 못한채 그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온 마을에 좀머씨를 찾는 작은 소동이 벌어졌을 때에도, 소년은 그가 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나를 좀 제발 그냥 놔 두시오」라는 좀머씨의 절규가 또 들려왔기 때문일까? 좀머씨의 존재는 곧 잊혀져갔고, 마을은 평온을 되찾았다.

좀머씨가 세상에 남긴 흔적은 마을 안팎에 무수히 찍혀 있을 보이지 않는 발자국뿐이다. 이러한 좀머씨의 모습은 문학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은둔자로 살아가는 쥐스킨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공적을 쌓아 세상에 뚜렷한 발자취를 새겨 놓은 사람들.

그런가 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사리사욕의 노예가 되어 역사에 오점을 남기게 될 사람들. 좀머씨나 그 작은 마을의 사람들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살다간 이름모를 다수의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연세대 음대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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