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딛고 군인의 길… 요직거쳐 청와대까지/북방외교 등 긍정평가·내치선 “무기력” 비판노태우씨가 지난 87년 16년만의 국민직접선거에 의해 13대 대통령에 당선됐을때 당시 언론들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었다. 「평범속의 비범」 「평범속에 감춰진 대기만성형」등등.
노씨가 전직대통령으로서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비리조사를 받기위해 검찰에 출두한 1일 많은 사람들은 당시 평가를 상기하면서 착잡한 반응을 보였다. 대통령으로서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그는 천문학적 수치의 축재에는 능했다는 비난속에 전직대통령 검찰출두 1호의 기록을 세움으로써 역시 「비범한」 인물임을 국민에게 새삼 인식시켜준 셈이다. 노씨는 63년 인생동안 큰 굴곡없이 군시절을 거쳐 일국의 국가원수까지 지냈지만 결국 「부정축재」를 일삼은 치욕의 지도자로 역사에 기록되게 됐다.
노씨는 지난 1932년 12월4일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현 대구 동구 신용동) 팔공산기슭에서 가난한 면서기의 2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구공업중학(현 대구공고)·경북중학(현 경북고)을 거쳐 51년 4년제 정규육사 1기생으로 입교한다. 이때가 노씨의 인생에 첫번째 전환점으로 기록돼야 할 것 같다. 80년대들어 「동지와 적」의 얄궂은 인연을 맺게되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동기생으로서의 친교를 시작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부인 김옥숙씨의 오빠인 김복동 의원등도 동기생관계를 이뤘다.
55년 9월 소위로 임관한뒤 「군인 노태우」의 길은 순탄했다. 일선 대대장, 맹호부대 대대장, 공수특전여단장, 청와대경호실 작전차장보의 요직을 모두 지냈다.
군생활의 절정은 지난 79년 9사단장 재임시절이었다. 10·26이후 전씨가 주도한 12·12쿠데타의 주역으로 참여하면서 권부로 진입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12·12당시 그는 9사단의 1개연대를 서울로 끌고 들어옴으로써 「반란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2·12 쿠데타에서부터 전씨에 뒤이어 2인자의 위치에 섰던 노씨는 5공시절내내 「2인자」의 위상을 차지했다. 5공출범직후인 81년 보안사령관(육군대장)에서 예편한 뒤 정무2·체육·내무장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등으로 권력의 전면에 나섰다.
85년 12대총선은 그에게 「정치인 노태우」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열어줬다. 민정당전국구 3번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12대국회 출범과 함께 곧바로 민정당 대표위원을 맡는다. 험난한 개헌정국을 6·29선언으로 돌파한 노씨는 87년 13대 대선에서 직선대통령으로 당선됐다.
5년동안의 임기 초반 5공청산문제로 발목을 잡혔던 노전대통령은 89년말 전전대통령을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회증언대에 세운뒤 90년 1월 3당합당을 단행함으로써 또다시 「비범한」 면을 보여주었다. 그는 주로 북방정책, 남북유엔동시가입등 외교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내치에서는 「물태우」별명을 들을 정도로 무기력, 무능력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3당합당은 그에게 민주계와의 당내 권력다툼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안겨줬다. 그는 김영삼대통령과 당을 함께 하는 동안 내각제각서 유출문제, 야당식 후보경선론, 후보 조기가시화, 정원식 내각 개각등을 놓고 날카롭게 대결했었다. 제2이동통신 사업자선정문제를 둘러싼 당시 김영삼 민자당 총재와의 갈등끝에 끝내 92년 9월 탈당과 중립내각선언의 악수를 둔 노씨는 김대통령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93년 2월 25일 「평민 노태우」로 돌아왔다.<신효섭 기자>신효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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