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국민의 관심이 노태우 전대통령의 부정문제에 집중되고 있는 시기에 유엔에서의 한국의 역할같은 문제를 끄집어 내는 것은 너무 한가롭게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국내에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국외문제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특히 북한문제에 대해서는 한 순간도 방심해서는 안된다. 우리와 관련된 주요 국가들의 대북한 관계의 동태에 대해서도 국내적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어야 한다.유엔에서의 한국의 역할문제는 물론 북한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보다 포괄적이고 비교적 장기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엔외교문제에 대해서도 이번 유엔창립 50주년 기념총회를 계기로 우리의 입장을 좀 더 뚜렷이 정리할 필요가 있다.
○국제적 주목 대상
한국은 유엔회원국으로서는 초년생에 불과하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크게 달라지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은 더 이상 「약소국」도 「개발도상국」도 아니고 경제발전과 정치민주화에 성공한, 세계에서 몇 안되는 주요 산업국가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유엔에서 한국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해 국제사회에는 상당한 관심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영삼대통령은 바로 이와같은 국제사회의 한국에 대한 인식과 관심을 배경으로 유엔창설 50주년 특별총회에서 유엔이 앞으로 「변화와 개혁」을 받아들일 것을 제의했던 것이다. 그런데 「변화와 개혁」은 김영삼대통령의 정치철학이기도 하지만 많은 유엔회원국들이 유엔의 장래를 위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는 처방이기도 하다.
유엔은 보스니아에서 처참할 정도로 무력함을 드러냈는데 사실 구조문제뿐 아니라 예산·인사등 관리면에서도 여러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유엔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나라들이 공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문제는 개혁의 내용과 방법이다. 모두 개혁이 필요하다고는 하면서도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가 없다. 실제로 유엔회원국들 사이에 개혁 내용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합의점에 도달하기 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 한국은 바로 개혁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 내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국이 유엔의 개혁과정에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우리는 국제문제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더 넓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과거 우리의 외교는 너무도 한반도문제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안보리에 들어가면 우리와 직접 관련이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관심과 입장이 필요하게 된다.
이것은 전문외교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지도층은 물론 일반 국민도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국가이익」의 개념을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항상 우리 국가의 안보및 경제이익만 추구한다면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호소력을 가질 수 없게 된다. 단기적으로는 다소 불이익이 되더라도 우리들이 지향하는 삶을 위해 필요한 국제질서의 확립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것을 선택할 줄 아는 장기적 안목이 필요한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인적자원에 투자할 필요가 있다. 흔히 한 나라의 외교적 영향력은 국력과 정비례한다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외교하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는 국력과는 상관없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유엔이다. 필자가 유엔대표부에 근무하고 있었을 시기에 싱가포르의 토미 고(Tommy Goh)대사나 우간다의 오투누(Otunu)대사같은 사람은 그들이 속한 나라의 힘과는 상관없이 유엔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유는 그들이 뛰어난 논리와 호소력을 가진 외교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유엔에서 다년간 근무함으로써 다자간외교에서 필요한 인맥(Network)을 형성할 수 있었던 사실도 큰 도움이 되었다.
○NGO 역할 증대
마지막으로 비정부단체(NGO:Non―Governmental Organization)들의 역할이 급속도로 확대되는 사실을 감안하여 우리 외교에 있어서도 비정부 시민단체들이 효과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정부 스스로가 적극 지원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코펜하겐에서 개최되었던 사회문제특별총회, 베이징에서 열렸던 여성문제특별총회등에서 NGO의 역할은 극적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앞으로 정보화시대의 외교는 정부의 전유물이 될 수 없고 시민사회와 더불어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한국은 그동안 회원국으로서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는 참으로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우리는 유엔의 정식회원국일 뿐만 아니라 유엔자체의 변화와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핵심멤버 국가로 부상하고 있다. 다만 유엔에서의 뜻있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좁은 국가이기주의를 넘어 넓은 인류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할 줄 아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사회과학원장>사회과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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