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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피살·유배… 일그러진 헌정사/노씨 비자금파문­국내 과거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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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피살·유배… 일그러진 헌정사/노씨 비자금파문­국내 과거청산

입력
1995.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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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시도 무위 하와이서 타계­이승만/부하 총탄에 절명 처참한 최후­박정희/동생·형·처남 구속 백담사행­전두환우리는 언제쯤이면 퇴임후 정상생활을 하는 전직대통령을 가질수 있을까. 일그러진 헌정사는 아직 그런 전직대통령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전직대통령은 모두 6명.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중에서 이전대통령은 하야후 망명했다가 이국땅에서 최후를 맞았고 박전대통령은 재임중 심복의 총에 맞아 운명했다. 전전대통령은 백담사에 유배되는 신세를 면치못했고 노전대통령 역시 비자금 때문에 대국민 사과를 하고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고 했다. 최전대통령도 5공 청산과정에서 청문회 출석요구로 시달려야 했다.

◇이승만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장기집권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최악의 선례를 남겼다. 이대통령은 국가의 기초를 다져야할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점에서 개인의 집권욕 때문에 헌정사를 왜곡시켰다는 비난을 더욱 강하게 받고있다.

그는 60년의 4·19혁명으로 2백여명의 사망자가 생기고 여론이 들끓는데도 이를 방관했다.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씨를 부정선거의 총책임자로 몰아 사퇴시키는 선에서 문제를 수습하려 했다. 24일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새 내각을 구성해 난관을 돌파하려 했으나 이는 국민적 반발을 자초했다. 25일에는 서울의 교수단 2백58명이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를 했고, 학생과 시민의 시위는 더욱 거세졌다.

이대통령은 4·19 일주일만인 26일 학생대표들과 면담한 자리에서 하야요구를 받고 이의 수용을 결심했다. 그리고 곧바로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는 등의 4개항으로 된 하야성명을 발표했다. 국회는 하야성명이 있은 직후 만장일치로 대통령의 하야를 결의했다. 이대통령은 27일 국회에 대통령직 사임서를 정식 제출한 뒤 경무대를 떠나 사저인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대통령은 사임서에서 『국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물러앉아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나의 여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바치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의 사임으로 허정 당시 수석국무위원이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해 과도정부를 이끌었다.

이대통령은 이화장으로 간 뒤에도 여론이 진정되지 않자 5월9일 정계은퇴 성명을 발표했고, 29일 전세기편으로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대통령은 이날 새벽 비밀리에 이화장을 떠나 김포로 갔으며, 김포공항에서는 허정수반과 이수영 외무차관, 몇명의 경호원만이 전송 했다.

이대통령은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 창밖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고, 프란체스카 여사는 비행기에 오르면서 『아이 러브 코리아(한국을 사랑한다)』라고 작별 인사를 했다.

이대통령은 말년에 고국에 돌아오고 싶다는 간절한 희망을 여러차례 피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65년 호놀룰루의 요양원에서 쓸쓸한 종말을 맞았다.

◇박정희

박정희 전 대통령은 79년 10월26일 저녁 7시50분 궁정동 안가에서 육사 동기이자 심복인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 부장의 총에 맞아 살해됐다. 현직 대통령이 재임중 살해당한 것은 처음이다.

박대통령은 이날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하고 귀경, 정보부의 궁정동 안가에서 김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 및 김계원 비서실장등과 함께 만찬을 함께 하다 김부장이 쏜 38구경 권총에 맞아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박대통령이 남긴 마지막 말은 총을 맞은 뒤 술시중을 들던 여인들에게 한 『나는 괜찮아…』였다. 김부장 일당의 궁정동 총격으로 박대통령과 차실장 및 경호실요원 5명이 사망했다.

정부는 박대통령 사망 3시간여만에 심야 국무회의를 열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기로 결정했으며, 최규하 당시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다. 불안한 최대행체제는 12·12군사반란을 가져왔고 정통성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5공으로 이어진다.

박대통령이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서 기념탑을 제막 했을 때 기념탑 커튼이 반밖에 걷혀지지 않았고, 도고온천에 들렀을 때는 노루 한마리가 헬기소음에 놀라 도망가다가 돌에 머리를 부딪쳐 죽는가 하면, 경호용 헬기 한대가 기관고장을 일으키는등 이상한 일들이 되풀이된 하루였다는 얘기도 있다.

박대통령은 쿠데타로 집권했다가 부인 육영수 여사를 저격범의 흉탄에 잃더니 끝내 본인도 총탄에 가는 비운을 맞아 독재자의 말로가 처참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박대통령은 69년 3선개헌을 밀어붙이는 것을 시작으로 장기집권의 길에 들어서 72년 10월 유신으로 1인 지배체제를 굳혔다.

박대통령의 1인 장기집권은 정통성 시비를 낳으며 국민적 저항을 불러 일으켰고, 79년 들어서는 YH사건과 김영삼 당시 신민당총재 제명에 이어 부마 민중항쟁으로 최대위기를 맞는다. 이 와중에서 일어난 김부장과 차실장의 파워게임 양상을 띤 충성경쟁이 권력 내부갈등을 촉발시켜 대통령 시해라는 비극을 가져왔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전두환

전두환 전 대통령은 88년 11월23일 연희동 자택에서 재임기간중의 실책과 과오및 비리에 대해 머리숙여 사죄한 뒤 쓰고 남았다는 정치자금 1백39억원과 개인자산 23억원등 전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부인 이순자 여사와 함께 백담사로 은둔했다. 전대통령이 손녀의 손을 잡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첫 대통령이라는 자부심 아래 청와대를 나온지 정확히 2백72일만의 일이다.

전대통령은 『3개월정도 있으면 될 것』이라는 6공측의 얘기를 듣고 백담사로 떠났으나 2년1개월(7백69일)이 지난 90년12월30일이 돼서야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백담사에 있으면서도 국회증언을 요구하는 야당의 공세에 시달렸다. 결국 89년 12월31일 국회의 광주특위와 5공특위 합동회의에 출석해 증언 했다. 국회증언으로 5공청산이 끝나고 자신의 연희동 복귀가 이뤄지기를 희망했으나 불성실한 증언은 오히려 여론을 악화시켜 그의 자택복귀는 1년이나 늦어졌다.

전대통령은 퇴임 초기만 해도 자신의 친구에게 정권을 물려주었기 때문에 느긋한 마음으로 퇴임후 구상을 했다. 집권당인 당시 민정당의 명예총재직을 맡고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에 취임해 국정에 막후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게 그의 퇴임후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 구상은 퇴임 한달이 못돼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전대통령은 퇴임한달이 채 못된 3월20일 20일간의 일정으로 레이건 미대통령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했는데 이 기간중 동생 경환씨가 구속됐다. 5공청산의 신호탄이었다.

5공청산은 13대 총선인 4·26선거의 최대 이슈가 됐고 여소야대의 13대국회는 5공비리특위를 구성해 5공을 단죄하기 시작했다.

10월의 정기국회에서 시작된 국회의 5공청산 공세는 여론을 들끓게 했다. 전대통령 친형 기환씨와 처남 이창석씨가 구속됐다. 전대통령은 5공청문회로 격앙된 민심에 무릎을 꿇고 백담사행을 택하며 이는 자신의 과오가 빚은 자업자득이라고 말했다.<홍윤오·고태성 기자>

◎이승만 전 대통령 하야 담화문 전문

나는 해방후 본국에 돌아와서 우리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 대로 할 것이며, 한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않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3,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전두환 전 대통령 대국민 사과문 요지

저는 지금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심경으로 여러분앞에 섰습니다. 이 모든 잘못에 대한 국민 여러분의 심판도 제가 받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피해를 당한 삼청교육대 사건과 공직자·언론인 해직문제, 인권침해 사례등의 실상들이 파헤쳐지는 것을 저도 아픈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80년 5월 광주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태는 우리 민족사의 불행한 사건이며, 저로서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제가 특히 부끄럽고 개탄스러운 일로 생각하면서,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할 것은 저의 친인척들로 인한 물의에 대해서입니다.

지난 2월25일 두살 난 손녀의 손을 잡고 청와대를 물러나오던 날, 저는 해외망명과, 부하에 의한 시해로 종말을 고했던 전임자들의 전철을 밟지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큰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자금과 관련해서 「권력을 남용한 전직대통령」 「부덕한 전직대통령」으로 낙인이 찍혀버린 지금 무엇을 더 숨기고, 무엇을 더 변명하겠습니까.

국민 여러분이 주시는 벌이라면 어떤 고행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며, 국민 여러분이 가라고 하는 곳이면, 조국을 떠나는 것이 아닌 한, 속죄하는 마음으로 어느 곳이라도 가겠습니다.

◎전직 대통령 비극일지

◇이승만

▲60년 3월15일=3.15 부정선거

▲4월19일=4.19 혁명

▲4월24일=자유당총재 사임

▲4월26일=하야담화문 발표

▲4월27일=국회에 대통령사임서 제출

▲4월28일=이화장으로 이사

▲5월29일=하와이로 망명

▲65년 7월29일=90세를 일기로 호놀룰루에서 서거

◇박정희

▲72년 10월17일=10월 유신

▲74년 8월15일=육영수여사 피격사망

▲8월11일=YH사건

▲9월8일=김영삼 신민당총재 직무정지 가처분결정

▲10월4일=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10월18일=부산에 비상계엄령 선포

▲10월20일=마산과 창원에 위수령

▲10월26일=궁정동에서 만찬중 피살

◇전두환

▲88년2월2일=대통령 퇴임

▲3월31일=전경환씨 구속

▲4월13일=국가원로 자문회의 의장 등 모든 공직사퇴

▲6월27일=국회 광주특위 및 5공 특위구성

▲11월3일=국회 일해재단청문회 시작

▲11월23일=대국민 사과성명 후 백담사 은둔

▲89년 1월27일=장세동 전경호 실장 구속

▲11월31일=국회 광주특위와 5공특위 합동회의에서 증언

▲90년 12월30일=연희동 사저로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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