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바로 되기보다는 타락하기 쉽다. 지배자들은 언제나 권력의 막강한 힘을 사용하거나 남용하도록 끊임없는 유혹을 받으며 일단 이 유혹에 빠지면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의 길로 접어든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권력자들은 권력을 잃고 나면 그동안 감추어졌던 「부패하고 타락한 정권의 실상」이 드러나 비참한 말로를 맞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사례들중에는 드러난 각종 비리들로 인해 법의 심판을 받는 게 일반적이지만 해외로 달아나거나 정치적 타협에 따른 유배성 망명을 통해 단죄를 벗어나는 경우도 많다. 또 극단적인 경우 처형이나 총살같은 비참한 최후를 맞는 권력자들도 있다. 권력자들의 뒤안길을 우리나라의 경우와 외국의 사례를 비교해 살펴본다.<편집자 주> ◎국내/3·15 부정선거 자행 하야·하와이 망명/18년 장기독재로 끝내 총탄에 쓰러져/「12·12」 등원죄·친인척비리로 백담사 유배/비자금 드러나 국민배신감 처벌 기로에 편집자>
우리나라 역대 권력자들의 끝은 한결같이 불행했다. 이승만·박정희대통령은 건국이나 경제발전의 기틀을 잡은 긍정적 공로에도 불구하고 1인장기독재로 인해 비극적 결말을 맞았고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은 12·12사태와 5·18로 인한 원죄와 개인비리등으로 인해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다.
◇이승만
48년 7월 제헌국회에서 간선제로 선출된 초대 대통령인 그는 59년 4대 대선때의 3·15부정선거와 이에 촉발된 4·19혁명으로 하야하기까지 12년간 장기집권했다.
그는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으로 권력에 의한 헌정유린의 나쁜 전례를 남겼다.
이승만 전대통령은 마지막 순간까지 권력의 집착을 버리지 않았다. 4·19 직후인 4월24일 자유당총재직을 사퇴하고 전국무위원 사표를 수리하면서 새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각계의 하야 촉구가 계속되자 같은 달 26일 『국민이 원한다면 사임하겠다』며 하야했다.
60년 5월9일 정계은퇴성명을 발표한뒤 같은달 29일 하와이로 망명한 그는 쓸쓸한 노년을 보내다 65년 7월19일 호놀룰루시 요양원에서 외로이 타계했다. 다만 그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날 당시 짐이 4개의 중형 보스턴백, 우산과 단장, 타자기 한대였다는 점에서 권력을 개인축재에 이용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박정희
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대통령은 개발과 독재로 상징되던 유신시대가 막을 내리기 까지 무려 18년간 집권했다. 정권의 민정이양을 약속하고도 63년 대통령선거에 출마, 3공화국을 수립했다. 69년 3선개헌으로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했고 71년에는 다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공약한뒤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듬해 유신을 단행했다.
종신집권체제를 구축한 그는 75년부터 긴급조치를 남용,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억제하는 1인 독재체제로 일관했다. 결국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가열되던 79년10월26일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18년간의 통치를 마감했다.
◇전두환
12·12 쿠데타로 집권한 그는 취임당시 비리 부정부패·정쟁 일소를 내세웠고 특히 정의사회구현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88년 퇴임 한달여만에 동생 경환씨가 구속되면서 그 역시 운명이 반전됐다. 13대 총선후 여소야대정국에 따라 5공비리특위 등이 구성됐고 그의 일가와 집권과정에 대한 단죄를 받게 된다. 그해 9월 자신의 임기중 치적으로 내세웠던 올림픽의 개막식에도 참석지 못했다. 11월에는 형 기환씨와 처남 이창석씨가 비리혐의로 구속됐고 같은달 23일에는 집권과정의 비리에 대한 사과와 함께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이 기간에 89년12월에는 헌정사상 전직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5공·광주특위연석회의에 증인으로 출석, 증언했다. 2년1개월여만인 90년12월 하산한 그는 이후에도 평화의 댐 건설의혹으로 감사원의 서면질의를 받고 해명해야 했다. 또 12·12,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피의자 신분으로 서면조사를 받았으며 「군사쿠데타의 수괴」로 인정됐으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없다」는 논리때문에 기소를 면했다. 아직도 그는 자유스럽지 못하다. 재임기간에 상당한 액수의 「통치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그에게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파문의 불똥이 튈 수도 있기때문이다.
◇노태우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했던 노태우 전대통령은 재임기간에 『어떠한 형태의 특권이나 부정부패도 단호히 배격하겠다』고 누차 강조했었다. 그는 자신 권력의 모태인 5공을 부정하고 단죄하면서까지 차별성을 입증하려했다. 92년9월에는 민자당을 탈당해 중립내각을 구성, 공정한 대선관리자임을 자임했고 퇴임후 보통사람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퇴임이후의 과정은 그의 희망과는 벗어나고 있다. 재임중 5공비리청산과 관련해 전전대통령과 소원해졌던 그는 새정부출범이후 율곡사업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를 시작으로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감사원의 서면질의에 『헌정사에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길 수 있다』 며 간단한 해명으로 화살을 비껴나간 그는 12·12와 5·18 관련해서도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최근에는 『5·18은 중국의 문화혁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요지의 발언으로 대국민사과를 해야 했다. 지난 8월 서석재 당시 총무처장관의 4천억원 비자금보유설에 강력히 반발했다가 이번 비자금사건으로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고 검찰의 조사를 앞두고 있다. 특히 이번에는 그동안 숱한 의혹이 제기됐던 상무대및 원전비리, 경부고속철도사업과 각종 골프장허가 과정의 비자금 수수의혹이 한꺼번에 제기되면서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정희경 기자>정희경>
◎국외/비리발각땐 대부분 해외 도피·망명길 떠나/선진국 경우엔 구속 등 엄정한 법심판대로/여론 압박에 자살·민중봉기로 처형되기도
세계 어디든지 권력형 비리로 「검은 돈」을 챙겼던 부패 권력자들은 대개 비참한 말로를 면치 못했다. 천하의 권세를 누렸던 권력자들도 퇴임후 검은 돈의 실체가 드러나면 역사의 「단죄 칼날」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리가 발각된 부패 지도자들이 흔히 찾는 출구는 바로 해외 도피와 망명. 특히 중남미와 아시아등 개발도상국에서 이같은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20년간의 독재기간중 1백억달러 이상의 비자금을 해외로 빼돌린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필리핀대통령과 35년간의 군부독재와 부정축재끝에 20억 달러이상을 챙겨 달아난 알프레도 스토로에스네르 전파라과이대통령.
86년 2월 필리핀 시민혁명이후 하와이로 망명했던 마르코스는 89년 이역 땅에서 숨을 거둬야했고 재임기간 각종 이권을 직접 챙기며 축재를 일삼았던 스토로에스네르는 89년 쿠데타이후 브라질로 망명했지만 역시 고립된 생활을 면치못했다.
카를로스 살리나스 멕시코전대통령도 비슷한 케이스. 작년말 친족들의 권력비리및 부정축재혐의가 제기되자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피하기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성 외유 상태에 있다. 최근에는 알베르토 다익 에콰도르 부통령이 자신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인근 코스타리카로 망명하기도했다.
부정부패는 물론 잔혹한 철권통치로도 악명높았던 우간다의 이디 아민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해외 망명을 택했지만 구차하게 연명하고 있는 독재자. 79년4월 권좌에서 축출된 아민은 한동안 망명처조차 구하지 못하다 회교도인 그를 용납한 사우디아라비아정부에 의탁해 연명하고있다.
이와는 달리 선진국의 경우 개인적 축재를 위해 권력을 이용한 지도자는 대개 엄중한 법의 심판대에 오른다. 검은 돈을 싸들고 해외 도피할 여지조차 허용치않는다. 다나카 가쿠에이(전중각영) 전일본총리가 미군수업체인 록히드로부터 뇌물을 상납받은 혐의로 구속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
그런가하면 부패혐의를 받자 목숨을 끊은 프랑스의 전총리 피에르 베레고부아같은 지도자도 있다. 친구로부터 1백만프랑을 무이자로 빌려 아파트를 구입했다는 언론폭로때문에 스캔들에 휘말리고 총선에서 패배하자 총리직을 물러난 직후인 93년5월 권총으로 자살했다. 비등하는 여론과 언론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티의 부패했던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처럼 죽은 뒤에까지 욕을 본 경우도 있다. 뒤발리에 세습정권에 항거해 86년 봉기를 일으킨 국민들이 그의 묘역을 샅샅이 파헤친후 시신까지도 난도질 한 것. 지난 57년부터 86년까지 뒤발리에 일족이 국고에서 횡령한 돈은 모두 6억달러를 넘는다는 게 아이티정부의 추계이다.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도 프랑스에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비참한 망명생활을 하고있다는 후문이다.
재임기간에 수십억달러를 축재했던 루마니아의 니콜라이 차우셰스쿠는 총살형이라는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24년간의 장기집권기간동안 개인적 영달과 독재권력에 탐닉했던 그는 89년 민중봉기로 사형수로 전락해 역사의 단죄를 받아야했다. 4억달러의 돈을 스위스은행에 예치하는 등 극도로 부패했던 권력자의 참담한 최후를 입증한 셈이다.
에리히 호네커 전동독공산당서기장은 90년 통독당시 사실상 해외추방된 경우. 호네커는 통일전 베를린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주하는 동독인을 총살한 혐의로 기소됐으나 신병치료를 이유로 러시아로 추방된뒤 최종망명지를 찾지못하고 전전하다 결국 칠레로 가 지난해 5월 외롭게 숨졌다.
물론 부패혐의를 받던 지도자가 정치적 재기를 시도하는 경우도 적지않다. 지난 92년 6백만달러의 뇌물수수혐의로 사임했던 페르난두 콜로르전브라질 대통령은 작년말 대법원의 최종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정치적으로 복권됐다. 에르네스토 삼페르 콜롬비아대통령도 작년 대선당시 마약조직으로부터 3백60만달러를 받은 혐의를 받고있지만 여당의원 중심의 탄핵조사위원회에 조사를 요청하는등 정치적 위기에서 출구를 모색하고있다. 하지만 이에대한 콜롬비아 국민들의 반감은 날로 격화되고있어 민중봉기가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게 현지언론의 보도이다. 부정부패로 얼룩진 권력자들은 끝내 역사와 국민의 엄중한 심판대에 설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있는 것이다.<이상원 기자>이상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