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자라는 말이 아직까지 쓰이고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몇군데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김일성이 통치하던 북한이라든지 카스트로가 통치하는 쿠바같은 데서는 지금도 유효한 통용어이겠으나 흉내라도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에서는 사라진지 오래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신시절과 5공이후 통치자라는 말은 없어지고 그대신 통치권자라는 단어가 신문지상에 간혹 등장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 통치권이라든가 통치행위라는 말은 심심찮게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민주주의의 역사가 일천하고 뿌리가 얕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업화에는 어느정도 성공했지만 민주화는 이제 막 개발도정에 들어선 후발국답게 통치라는 말이 우리 국민들에게는 아직 그리 낯설지는 않다. 노태우 전 대통령시절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지낸 이현우씨가 3백억원 차명계좌와 관련, 『이 돈은 노대통령 재직시 통치자금 가운데 쓰다 남은 것으로…』 운운한 것도 얼른 듣기에는 우리 귀에 아주 어색하지는 않은 것같다. ◆「고도의 통치행위에 속하는 것으로」라든지 「통치권 차원의 결단」 또는 「통치자금중 일부로서」라고 하는 말들을 비교적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통치가 민주적 법질서에 수용되기 어려울 정도로 민주주의가 아직 덜 익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이 「통치」가 실정법과 충돌하는 경우다. 5·18이나 비자금문제를 풀기 어려운 것도 바로 이때문일 것이다. 경험의 축적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이런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것도 민주역량을 키우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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