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관치 금융시대 거쳐온 부작용/이씨진술로 「정치권과 공생」 재확인정치와 금융, 보다 정확히 말해 비자금과 금융기관은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이다. 오랜 관치금융시대를 거쳐온 우리나라 금융권은 정치자금 조달통로로, 또 비자금관리채널로 「기여」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현우 전청와대경호실장이 22일 검찰에서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예치된 문제의 차명계좌 3백억원은 노태우 전대통령이 통치자금으로 쓰다가 남은 돈』이라고 밝힘에 따라 이 공생관계는 다시 한번 확인된 셈이다.
금융은 돈의 집결지다. 자금이동도 잦다. 마음먹고 흐름을 추적하지 않는 한 돈이 어떻게 조성되고 어디로 유출됐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다. 은닉의 본능을 갖고 있는 비자금의 생리에 꼭맞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금융을 장악하지 않는 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은 과거 통치에서 입증된 불문율이었다. 재무부장관 은행감독원장 자리가 왜 중요했고, 「금융계 황제」는 왜 군림했으며, 「확실한 끈」이 없으면 은행장은 물론 이사도 될 수 없다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를 보면 정치와 금융의 연결고리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현 정부출범이후 과거단절차원에서 제일 먼저 사정의 칼날을 들이댔던 곳이 바로 금융권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금융기관은 한때 정치자금의 직접적 조달처였다. 과거 은행들은 기업대출의 대가로 커미션(사례금)을 받아 자체 비자금을 조성했고 상당액을 정치자금으로 헌납했다. 국회의원 장관 청와대등 대상도 다양했고 액수도 천차만별이었다. 동화은행 비자금사건은 그 대표적 예이다.
대출커미션으로 수십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 정치권에 제공한 안영모 전동화은행장과 이 돈을 받은 김종인 전청와대경제수석이 구속됐고 6공 금융계 최대실세로 군림하던 이원조 전의원과 이용만 전재무부장관도 수뢰혐의로 장기외유길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동화은행은 빙산의 일각」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금융기관은 정치자금관리에서도 중요한 곳이었다. 고위층 비자금관리에는 은행 뿐 아니라 증권·투금사등도 함께 동원되는게 상례이다. 몇개로 쪼개진 계좌로 수표와 현금이 몇차례 오가는 세탁과정을 통해 돈은 안전하게 관리된다. 물론 계좌는 가·차명형태이다. 최고위층 비자금은 별도관리하는 금융관계자가 있다는게 통설이다. 최근까지도 『제2금융권 모씨가 고위층 ○○○씨의 자금관리자』 『전직대통령 ○○○씨 돈이 채권에 묻혀있다』는 소문등이 무성했었다. 금융실명제는 이같은 정치비자금의 조성·관리구도를 허물어뜨렸다. 5공초 실명제가 시행직전까지 갔다가 무산된 것은 고위층에게 한 측근이 『실명제가 실시되면 앞으로 정치하기 어렵습니다』라고 「직언」했기 때문이라는 유명한 일화가 지금도 전해진다. 투명성을 전제로 한 실명제는 은닉과 익명성을 요구하는 정치비자금과 상극관계이다.
그러나 합의차명으로 빠져나간 비자금, 미처 손쓰지 못해 묻혀있던 비자금은 천문학적 규모에 달할지도 모른다. 이번 노전대통령 정치자금조사로 금융계엔 전대미문의 회오리바람이 불지도 모른다.<이성철 기자>이성철>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