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화 오동성/발해성벽은 제방되어 옛영화 간직한채…/길림·흑룡강성일대 50여곳 고분·성터 산재/채소밭 돼버린 첫도읍지엔 표석만이 쓸쓸히고구려·발해를 만나러 간다. 한문화의 원류를 찾아 중국내의 문화유적지를 답사하는 일은 오늘의 우리 문화를 알기 위한 역사기행이다. 중견구상화가 12명과 한국일보 취재진으로 구성된 답사팀은 8월19일부터 9월2일까지 2주일동안 1만여리의 대장정을 하면서 산성과 유물로 남아 있는 배달민족의 기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압록강 이북에 있는 고구려·발해의 성은 확인된 것만 2백여개. 주로 랴오닝(요녕)성과 지린(길림)성 지역에 있는 이 산성들은 서로 랴오허(요하), 북으로 쑹화(송화)강과 헤이룽(흑룡)강, 동으로 두만강 이북에 이르는 대제국의 보루였고 강인한 호국정신의 상징이었다. 또 중원의 여러 민족과 교류하면서 한문화의 원류를 이루어 한반도에 전달한 거점이기도 했다.
발해는 지린(길림)성 둔화(돈화), 헤이룽장(흑룡강)성 상경성터등 50여 군데에 고분과 성터를 남기고 있다. 고구려의 유장 대조영이 7세기말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당의 속박에서 벗어나 첫 도읍으로 삼은 곳은 둔화지역. 지린(길림)시와 옌지(연길)시의 중간지점인 둔화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소도시이다. 이 무단(목단)강 상류지역에 강을 사이에 두고 유적이 산재한다.
대조영이 당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정착한 오동성과 영승유적, 성산자산성, 3대 문왕의 둘째딸 정혜공주의 무덤이 발견된 륙정산 고분군등은 발해의 성지이다.
지린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5시간만에 둔화에 도착한 일행은 곳곳에서 「발해」와 「오동성」을 딴 상호를 보며 발해의 고도에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안내를 맡은 둔화문물연구소장 위진원씨는 『3∼4년 전부터 성정부 중심으로 발해유적지를 관광지로 개발해 주민들도 발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둔화시 중심에서 멀지 않은 오동성터는 채소밭과 농가 20여가구가 다닥다닥 붙은 판자촌이 돼 있었다. 마을입구의 표석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해동성국의 도읍지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1높이의 기단 위에 가로 130㎝, 세로 90㎝정도로 세워진 표석은 나무와 쓰레기더미에 묻혀 있었다. 겨우 밀치고 들어가 확인해보니 「오동성은 당조시기 발해국의 초기도읍으로 성자리는 정방형이며 성벽은 흙을 다져 쌓았다」는 내용이 한글과 한자로 적혀 있었다. 10년째 이 마을에 살고 있다는 조선족 이정길(42)씨는 『우리 민족이 세웠던 도읍지에 산다는 사실에 항상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채소밭 사이로 난 길과 판자골목을 이리저리 돌아가자 높이 2정도의 둑길이 나왔다. 그 둑길이 성벽이었고 그 너머에 하천과 저습지대가 있었다. 둑길 아래서 성벽을 쌓은 돌과 주춧돌이 발견됐다고 한다. 위씨는 『이 일대는 문헌연구와 현지조사를 거쳐 61년에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됐다』며 『오래전부터 주택가가 자리잡아 본격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유물도 거의 발견되지 않아 2년전부터 저습지등에 공원조성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훼손된 유적지는 가슴 아팠고 잊혀져가는 역사는 안타까웠다.<최진환 기자>최진환>
◎발해의 역사·문화/698년 대조영이 만주·연해주일대에 건국/말갈족 지배… 고구려·당 접합문화 융성
발해는 698년부터 926년까지 2백28년동안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 북부지역을 지배했던 복합민족국가. 발해라는 이름은 713년 당이 건국자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해 국가실체를 인정한데서 비롯됐다.
오동성지역에 도읍을 정했던 발해는 문왕때까지 동북만주와 연해주남부 일대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기틀을 다졌다. 10대 선왕(선왕)때는 주변 말갈세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랴오허강 일대로 진출, 소고구려를 강토에 포함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했다.
또 5경 15부 62주의 지방행정제도를 완비했다. 선왕 붕어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반목과 피지배층인 말갈족의 자각으로 내분이 계속되다 926년 요태조 야률아보기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발해의 문화유적은 1945년 주요도성 발굴, 49년 연해주지방 발굴과 정혜공주무덤 발굴, 81년 정효공주무덤 발굴등을 통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사찰에서 나온 돌사자장과 돌부처, 와당의 연화문은 강건하고 활달한 고구려문화와 화려한 당문화를 접합시킨 발해문화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작가메모/김영회씨
오동성터를 그린 김영회는 『발해의 첫 도읍지인 오동성의 흔적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까웠지만 과거의 성벽이 하천의 범람을 막는 방벽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과 이 노을이 물에 비친 모습을 대비시키면서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분위기를 이루어냈다.
오른쪽의 제방을 강조하고 하천 건너편의 임업가공공장지대와 아파트촌을 화면중앙에 배치함으로써 균형과 안정을 꾀하려 했다고 말한다.□약력
▲44년 서울출생
▲서라벌예대 회화과 졸
▲국전입선 2회
▲서울아카데미·신미술회·신작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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