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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흑백갈등…미국의 고민/블랙먼데이 대행진 계기로 본 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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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흑백갈등…미국의 고민/블랙먼데이 대행진 계기로 본 실태

입력
1995.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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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바뀐게 없다” 흑인불만 고조/유대·한국인 등에 엉뚱한 분풀이도/백인은 “역차별로 되레 피해” 반발「직업과 자유(쟁취)를 위한 워싱턴 행진」. 32년전인 63년 8월27일 흑인들이 워싱턴에서 벌인 대규모 시위때 주최측이 내걸었던 명칭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다」는 명연설로 더 잘 알려진 이날 시위는 일부 백인들까지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주최측 대표들은 집회가 끝난 뒤 백악관으로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린든 B 존슨 부통령을 예방했다.

수십만명이 참가한 16일의 흑인 집회는 규모면에서는 63년의 시위와는 비교가 되지않을 정도로 커졌다. 하지만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흑인 시위대의 요구사항은 그 당시와 조금도 변한게 없다.

흑인들의 사회적 지위와 생활에 관한한 30여년의 세월이 가져다 준 것은 시간의 흐름뿐이라는 해석도 무리가 아니다. 32년전과는 달리 이번 행사의 주최측 인사들은 빌 클린턴대통령이나 앨 고어부통령을 만나지도 못했다.

미대법원이 흑백분리 교육에 대한 위헌판결을 내린지 40년. 의회가 흑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률을 통과시킨지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상당수의 흑인들은 인종적 편견과 차별속에서 역경의 나날을 살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백인사회의 의식구조이다. 백인들은 각박해지는 생활환경 속에서 흑인을 「부담스러운 형제」로 인식하고 있다. 공화당 소속의 한 하원의원은 『흑인들은 출산만 하면 생계보조금이나 의료보조금을 타기 때문에 다니던 직장마저 그만 두는 경우도 있다』며 『흑인의 출산율 증가를 제도적으로 부추기는 현행 복지법체계를 뜯어고쳐야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흑인들은 백인들의 교묘한 차별때문에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백인들은 소수계 우대정책 때문에 「역차별」이 심화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백인들의 차별과 멸시에 대한 흑인들의 보상심리는 엉뚱하게 여타 소수민족에 대한 반감으로 번진다. 이번 행사를 주도한 루이스 패러칸은 로이터 TV와의 인터뷰에서 흑인 거주지에서 돈을 번 뒤 그곳에 투자하지 않는 유대인 아랍인 한국인 베트남인등을 「흡혈귀」라고 불렀다.

O J 심슨 판결이 내려지던 날 자연발생적으로 노출된 흑인들의 환호와 백인들의 경악은 흑백갈등의 괴리를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16일 모인 수많은 흑인들은 32년전의 그날과 마찬가지로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라는 노래를 부르며 백인들의 부당한 차별에 항의하고 스스로의 단결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많은 백인들은 32년전에도 그랬듯이 흑인들의 노랫말에 공감하지 못했다.<워싱턴=이상석 특파원>

◎미 흑인사회 실상/인구비 12%… 소득,백인 63%선/“노예출신” 인식 평등화 최대벽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흑인들의 집단 거주지 할렘은 가난과 범죄의 상징으로 통한다. 거리는 지저분하고 빌딩들은 마치 버려져 있는 듯이 을씨년스럽다. 임대료를 내지 못한 가구의 집살림이 보도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면 아침부터 소화전의 물을 틀어 빨래를 하는 주부도 어렵지 않게 눈에 띄는 곳이다. 택시운전사들도 할렘만큼은 들어가기를 꺼린다.

지난 90년 연방정부가 전국적으로 실시한 법정 센서스에 의하면 미국인구 2억4천8백여만명중 2천9백90여만명이 흑인이다. 비율로 볼때 12.1%로 흑인은 분명 미국사회의 소수에 속한다. 하지만 여러 소수인종중에서 가장 다수인 소수이다. 그러나 흑인 문제가 미국사회의 문제로 상징화해 있는 것은 소수의 다수라는 흑인이 처한 「이중적 상황」에서 오는 것만은 결코 아니다.

미국의 흑백문제는 건국과정에서부터 뿌리를 두기 시작한 원초적인 문제이다. 미국이 최초로 법정 센서스를 실시한 1790년 당시 미국인구 3백90여만명중 흑인은 노예 69만여명과 「자유인」 5만9천여명을 합해 약 20%나 차지했다. 당시 토머스 제퍼슨은 『노예가 해방돼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한 이치이지만 백인과 흑인 두 인종이 결코 한 정부 아래서 동등한 자유를 누리며 살수는 없을 것』이라고 이미 우울한 「예고」를 했다.

미국사회에서 흑인문제는 계급문제이다. 90년 센서스에 의하면 백인의 평균 소득은 3만1천여달러인데 비해 흑인의 평균소득은 1만9천달러로 백인의 63%에 해당한다. 흑인유아 사망률은 백인의 두배이다. 흑인의 평균수명은 백인보다 6년이나 짧다. 대학진학률은 백인의 절반에 불과하고 대학졸업생의 평균임금은 백인보다 25%가 적다.

미국의 흑인사회를 특징짓는 또 한가지 요소는 이들이 노예출신이라는 역사이다. 미국사회의 흑백문제가 단순히 사회정책적으로 해결돼 오지 못한것은 다른 사회에는 없는 이 대목 때문이다.

한 흑인작가는 『백인과 흑인은 나란히 살고 있지만 결코 함께 살고 있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흑백갈등은 인종문제가 개재된 빈곤의 악순환이라는 점에서 해결되기 어려운 미국 사회의 영원한 부담처럼 보인다.<뉴욕=조재용 특파원>

◎흑인 저항운동사/20세기초부터 조직민권운동/킹목사,투표권·공학등 따내/말콤엑스 주도 폭동대항도

미흑인의 역사는 백인에 의한 기나긴 수탈과 여기에 맞선 분노와 좌절의 저항사로 요약된다.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대통령의 해방선언으로 노예의 굴레를 벗어났지만 아직도 흑백간의 실질적 평등은 요원한게 현실이다.

미대륙에 흑인이 처음 유입된 때는 1620년. 미 남부지역의 면화재배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대량 노예로 납치해오기 시작한 게 그 시초다. 당시 흑인노예들은 인간이하로 취급받으면서 가혹한 수탈과 학대에 시달렸으며 이같은 신분상 차별은 흑인들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20세기초까지 계속됐다. 흑인들이 처음 조직적인 민권운동을 시작한 것은 1909년 인종차별 철폐를 목표로 한 흑인단체인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및 인종평등회의(CORE)가 잇따라 결성되면서부터다. 그러나 40년대까지만 해도 미남부 흑인 가운데 77%는 백인과 격리됐으며 물 마시는 수도꼭지부터 화장실, 학교도 따로 이용해야하는 등 사회적 불평등은 뿌리깊게 지속됐다.

50년대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목사의 등장은 흑인 권익 향상에 기폭제가 됐다. 55년 흑백차별 버스승차 거부운동을 출발점으로 한 킹목사의 조직적인 비폭력 저항운동은 64년 흑인 투표권보장, 공공시설내 차별금지, 흑백공학추진등을 골간으로 한 민권법 통과로 결실을 보았다.

하지만 흑인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킹과 함께 흑인의 양대지도자였던 말콤 엑스의 영향력이 도시 빈민층 사이로 퍼져가면서 급기야는 64년 뉴욕 할렘과 65년 로스앤젤레스 와츠에서 대규모 흑인폭동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뒤이은 말콤 엑스와 킹의 암살은 흑인의 소외의식과 좌절을 더욱 깊게 했다. 70·80년대 정치권의 수차례에 걸친 민권법 수정조치로 인종문제는 외양상 소강국면을 맞은 듯했지만 흑백대립은 여전히 미국사회의 잠재적 「시한폭탄」으로 남아 있다.<이상원 기자>

◎대행진 주도 루이스 패러칸/과격파 「이슬람 국가」 지도자/흑인 70% “속시원한 대변자”

O J 심슨이 「세기의 재판」을 통해 미국사회의 흑백갈등에 불을 질렀다면 루이스 패러칸(62)은 「1백만 흑인남성 대행진」을 주도, 그 불에 기름을 뿌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과격 흑인단체인 「이슬람 국가」의 지도자 루이스 패러칸은 이번 행사로 백인들에게는 「증오의 전도사」로 낙인찍혔지만, 흑인들에게는 「속시원한 대변자」로서 우상이 되고 있다. 지난해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67%의 흑인이 그를 지도자로서 인정했으며 70%는 미국 사회가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답했다.

패러칸은 흑인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야 하며 마약과 범죄, 그리고 백인들의 억압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줄곧 역설해 왔다.

백인들은 흑인보다 열등하고 유대인과 한국인등은 흡혈귀같은 존재라고 강변하는 패러칸은 심화하는 인종갈등의 골을 기반으로 그 입지를 넓혀온 과격파 흑인지도자.

1933년 뉴욕의 빈민촌 브롱크스에서 태어난 패러칸은 55년 「흑인 이슬람주의」를 주창한 말콤 엑스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 국가」에 합류했으며 탁월한 언변과 조직력으로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말콤 엑스가 온건노선으로 선회하자 「죽어 마땅한 배신자」라고 규정했고 말콤엑스는 그 두달뒤 이슬람행동주의자에게 살해됐다. <윤순환 기자>

◎상류흑인 전형 콜린 파월/인종문제 비켜선 대권주자 흑인보다 백인층지지 높아

미국 최초의 흑인대통령감으로 거론되는 콜린 파월 전합참의장의 피부색은 검다. 그러나 그의 모든 행동과 사고에서 「흑인」이란 변수는 거의 찾을 수 없다. 그가 16일의 흑인 대행진에 불참한 것도 『흑인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될 것도 없지만, 흑인이기 때문에 해야만 할 일도 없다』는 자신의 인종관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인생역정은 「아메리칸 드림」의 한 전형이다. 자메이카 흑인이민 2세인 그는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도 자녀교육에 온 정성을 쏟은 부모의 열성에 힘입어 흑인 최초로 대장과 합참의장에 오르는 신분 수직이동을 이뤄냈다. 또한 그의 사촌들도 언론사사장 대사 차관 연방판사 변호사 의사등으로 자리잡아 여느 백인가문보다 더 훌륭한 상류가문을 형성했다. 그래서 파월은 흑인도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피부색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산 증거로 칭송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흑인사회에서는 그리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흑인들 사이에서 그의 지지도는 말콤 엑스나 킹목사는 물론 또 다른 흑인대권후보자로 거론되는 제시 잭슨목사나 심지어 O J 심슨보다 훨씬 밑도는 수준이다. 반면 그가 평생동안 「속해 있던」백인사회로부터는 높은 지지를 얻고 있다. 흑인들에게 그는 「성공의 모델」이긴 하지만 대변자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워싱턴=정병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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