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손아귀 악몽의 9시간 17분/크렘린궁 관광직후 괴한 버스 뛰어들어/범인 경찰에 포위되자 “폭탄” 위협 아찔/섬광탄·총성속 특공대 손길 “살았구나”우리 연수단원 26명이 크렘린궁 관광을 마치고 다음 일정인 서커스 관람을 위해 인근 성 바실리성당 언덕 주차장에 세워둔 관광버스에 오른 시각은 모스크바 하늘의 놀이 물들기 시작한 14일 하오 5시 30분(현지시간)이었다. 일행은 연수단 26명외에 한국에서 같이 온 관광안내원과 현지채용 가이드및 러시아인 버스 운전기사등 모두 29명이었다.
일행이 얘기를 주고 받으며 거의 좌석에 앉았을 때였다. 복면을 한 건장한 체격의 남자 1명이 갑자기 버스에 올라 탄 후 권총을 겨누며 러시아어로『창문 커튼을 닫아』라고 소리쳤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고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났다. 그러자 범인은 천장을 향해 공포탄을 발사했다. 버스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총소리와 매캐한 화약냄새에 놀란 일행중 몇명이 버스 주변에 몰려있던 상인에게 손짓으로 위급하다는 뜻을 전했으나 야속하게도 상인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러나 이 틈을 타 박연수(박연수)연수단장등 2명이 버스 뒷문을 통해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범인은 현지 가이드 서견수(28·모스크바 항공대 4년)씨를 통해 『내가 필요한 것은 1백만달러와 탈출에 필요한 헬기』라며 『동생가족과 내 자식이 인질로 잡혀있어 돈이 필요한 것 뿐이다. 돈만 받으면 당신들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오 6시께 경찰이 몰려와 버스를 에워쌌다.
범인은 경찰이 몰려오자 초조한 듯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손에 든 꾸러미를 보여주며 『폭탄인데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단추를 눌러 폭발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 사이 버스는 볼쇼이 모스크바 레스키 다리위로 이동, 경찰과 대치했다.
하오 8시30분께 일행중 한명이 기지를 발휘, 범인에게 『일행중 2명(처음 탈출한 사람들)이 행방불명됐다』고 둘러대자 그는『한사람이 나가서 찾아오라』며 윤동현(30·현대전자 반도체 사업본부)씨를 풀어주었다.
범인의 요구가 통한 듯 하오 8시 50분께 경찰이 돈가방을 전달했다. 돈을 세어 본 범인은 하오 9시께 일행중 여자 9명 전원을 다시 석방했다. 나중에 서씨에게 들으니 1백달러짜리 뭉치가 47개쯤 될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경찰은 범인에게 나머지 돈을 전달할테니 인질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고 범인은 15일 0시 20분까지 3차례에 걸쳐 11명의 인질을 더 풀어주었다.
마지막까지 범인에게 인질로 잡힌 사람은 나와 동료 3명, 가이드 서씨, 운전기사 블라디미르(35)등 모두 6명이었다. 새벽 2시 47분 러시아 경찰 협상팀이 운전기사석으로 와 범인이 추가로 요구한 돈가방을 건네주었다. 서씨가 돈을 세보라는 범인의 지시에 따라 돈가방을 여는 순간『펑』하는 폭음과 함께 섬광탄이 터졌다. 자욱한 연기에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타타탕…』하는 총성이 귀를 찢었다. 총소리를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의자밑으로 엎드렸다.
특공대원들이 버스 유리창을 깨뜨리며 뛰어 들어왔다. 눈깜박할 사이에 상황이 끝났다. 우리들은 대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버스 밖으로 나왔다. 뒤돌아보니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있는 범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목시계의 초침은 2시 47분 50초를 지나고 있었다. 악몽이 끝나는 순간이었다.<모스크바=이장훈 특파원>모스크바=이장훈>
◎러 인질사건 왜 잦을까/치안 부재·일확천금 심리 주인/부패만연·무기범람도 한몫… 올 10여건
러시아는 이번 사건으로 「치안부재국가」라는 오명을 씻을 수 없게 됐다.
러시아에선 인질 납치 조직범죄등 강력사건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지난 5월 러시아 남부 부덴노브스크시에서 체첸게릴라들이 병원건물을 점령한채 인질극을 벌여 1백여명을 사망케 하고 인질과 함께 유유히 도망가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빚어졌었다.
또 지난달에는 다게스탄에서 역시 2명의 범인들이 버스를 납치, 승객을 인질로 잡고 돈을 요구하다 체포되는 등 올들어 현재까지 10여건의 크고 작은 인질사건이 일어났다. 지난 91년 러시아공화국 출범이후 강력범죄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같이 강력사건이 빈발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공권력이 치안 확보등 제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산부족으로 현대적 수사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고 적은 보수때문에 유능한 수사관이 현직을 떠나고 있는데다 부정부패가 극심해 범인과 수사관이 결탁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부덴노브스크사건 당시 범인들은 경찰검문소 22곳을 통과하면서 무려 20여군데서 뇌물을 주고 검문조차 받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었다. 또 구소련붕괴이후 각 공화국의 내전과 민족갈등, 군내부의 부정부패등으로 각종 무기들이 암시장에서 대량으로 밀매되고 있고 돈만 있으면 이를 쉽게 구입할 수 있어 총기를 사용한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이후 빈부 차가 극심해져 가난한 서민들이 불법적인 방법으로라도 일확천금을 노리는 심리가 확산되고 있고 각 민족간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눈에 보이지 않는 보복심리가 팽배해지고 있는 것도 범죄 빈발을 부채질하고 있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그동안 수차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등 강력한 대범죄정책을 추진해왔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에따라 관광객은 물론 러시아국민들조차 러시아를 「사건공화국」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모스크바=이장훈 특파원>모스크바=이장훈>
◎납치극 시간별 상황(괄호안은 한국시간)
▲14일 하오 5시30분(하오 11시 30분)=모스크바 중심부 붉은 광장 인근 성 바실리성당 언덕 주차장에서 인질극 발생. 박연수씨등 2명 탈출
▲하오 8시 30분(15일 상오 2시30분)=인질 중 윤동현씨 석방
▲하오 9시(상오 3시)=여자인질 9명 전원석방
▲하오 9시 30분(상오3시 30분)= 남자인질 3명 석방
▲하오 11시 30분(상오 5시30분)=남자인질 7명 석방
▲15일 0시 20분(상오 6시 20분)=남자인질 1명 석방
▲상오 2시 47분(상오 8시47분)=모스트은행 현금수송차량에 탑승한 러시아 대테러 특수부대원 버스에 접근, 구출작전개시 21초만에 나머지 인질 6명 무사히 구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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