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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석학들과의 「탈현대론」 논의(지구촌시대의 문화변동:8·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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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석학들과의 「탈현대론」 논의(지구촌시대의 문화변동:8·끝)

입력
1995.10.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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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위기 극복 또다른 변화추구/“다원화사회 보는 새 시각” “과거조합 불과” 개념논란/다양한 전통 문화유산의 비판적 수용이 남겨진 과제이번에 지구촌 문화변동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세계가 빨리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어쩌면 근대문명의 합리성이 소진하면서 새로운 문명이 태동하는 세기말적 전환기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예로 어디를 가나 기존 정당과 대의정치에 대한 시민의 환멸은 매우 크다. 근대의 산물인 좌우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고 관료조직은 병리현상에 둘러싸여 있으며 지역문화가 꽃을 피면서 민족을 둘러싼 집단의 자의식이 만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의 방향은 어떤 것일까. 그 하나의 열쇠는 「탈현대(POST―MODERNITY)」라는 개념에 있다. 그래서 이번 탐방중에 만난 지식인들과 가졌던 탈현대에 대한 논의를 간추려 연재의 결론으로 삼고자 한다.

우선 지적할 점은 프랑스에서 조차 탈현대 개념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문명이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진단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실업 빈곤 폭력 인종분규 같은 사회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현대를 특징짓는 사회조직의 통합력과 합리성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래에 대한 전망에 있다. 여기서 탈현대를 옹호하는 지식인과 비판자의 시각이 달라진다.

먼저 코넬리우스 캐스토리아디스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그리스 출생으로 젊은 시절에는 열렬한 트로츠키주의자였고 지금은 파리의 저명한 좌파 이론가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의 주된 관심은 「사회적 상상력」이 역사변동에 미친 영향이다. 「잘 살아보자」는 대중의 신바람이 우리의 60년대와 70년대를 이끌었던 것과 같은 현상을 좌파의 눈으로 멋있게 분석했다. 그러나 탈현대 주장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그 가치를 일축했다.

○컴퓨터산업 발전이 바탕

『탈현대란 일반화 된 동조주의 시대를 뜻할 뿐이지요. 소련이 무너졌고 동유럽이 변했다고 하지만 지적으로, 정신적으로, 정치적으로 새로운 변화는 50년대 이래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는 「나무는 그 과실을 보고 평가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탈현대론자들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껏해야 과거의 다양성을 한데 모은 건축물처럼 선택적 조합을 했을 뿐 입니다. 아무런 창조성이 없어요. 이들은 새로운 제품과 기술로 마치 혁명적 변화를 선도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소비자의 선택의 폭은 확실히 넓어졌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비슷합니다. 다양성 속에 일반화 된 동조주의가 판을 치고 있지요』

금년 71세의 프랑수아 리요타르는 즉각 반발했다. 그는 탈현대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쓰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프랑스 철학자다.

『먼저 우리를 보수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묻습니다. 어떤 입장에서 현체제에 대한 대안을 구성할 수 있느냐고요. 지난 2백년간 우리는 자본주의는 문제가 많다는 가정하에 새로운 주체, 새로운 비전으로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젊었을 때는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비극으로서의 정치를 넘어서는 역사의 구원과 해방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나는 다르고 독특하며 개체적이라고 주장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오늘날은 동조주의의 한 모습일 뿐입니다』

대화를 하면서 나는 리요타르의 탈현대는 독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이론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탈현대의 밑바탕에는 정보 통신 컴퓨터 산업의 발전이 있습니다. 또한 심미적 체험의 급진화와 다원화가 있지요. 사회체제는 고도로 분화하고 복잡하게 변합니다. 그러면 전체를 조망하는 어떤 특권적 위치도 소멸하지요. 즉 어떤 목적도 방향도 없이 사회의 각 부문은 자체의 논리로 굴러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체제를 대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적정 수준에서 체제를 관리할 수 있을 뿐 입니다. 기존의 윤리 도덕 정치 시민권등은 모두 문제가 많지요. 이 변화된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이 탈현대입니다』

목적이 사라졌다는 의미에서 리요타르는 니힐리즘(허무주의)을 일종의 해방이자 자유로 파악했다. 심미적 체험이 1세기전에는 불가능했던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황의 우연성 국지성 다원성을 지적 호기심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그가 말하는 탈현대의 도덕은 인간관계의 국지적 성격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탈현대의 도덕에는 두가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지요. 질문을 하고 남의 말을 듣는 도덕성 위에 정의가 자리잡습니다. 또한 탈현대의 도덕은 인간만이 아니라 우주와 자연현상, 예컨대 땅 바위 강 식물 동물에도 적용되는 것이지요. 착취적이고 정복적인 태도는 탈현대와 어울릴 수 없습니다』

○60년대 히피문화서 출발

나는 탈현대의 문제를 사회학적으로 접근하는 소르본 대학의 미셸 마페솔리를 만났다. 그는 세계화의 이면에서 지방문화의 부활을 강조했다. 그는 60년대의 히피문화에서 탈현대의 출발을 찾았다. 그 씨앗이 익어 오늘날 다양한 부족주의 현상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미셸 푸코가 근대를 잘 파악했다고 봅니다. 가족 직장 사회를 잇는 견고한 기성체제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고정된 정박점을 가지고 일생을 살았지요. 그러나 상황은 변했습니다. 우선 가족제도가 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혼이 오히려 정상이 되고 고대 그리스에서 발견되는 성적 「유목성」이 증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 직장에서 한평생 일하는 것도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일하다 쉬며 공부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직장을 구하는 것이 자연스럽지요.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더 이상 좌우의 이념 축으로 볼 수만은 없는 분화와 변이를 보입니다. 사회와 문화의 유동성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 보드리야르교수의 미래전망은 다소 비관적인 것처럼 들렸다. 그는 현대인의 삶은 이제 미디어의 이미지로 꾸려지는 가상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주체는 더 이상 사물위에 군림할 수 없고 반대로 사물의 급진적 우연성과 개방성에 적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시뮬라시옹」의 시각에 싫증을 느껴 최근 「환상」의 테마로 나아가고 있다. 인간의 삶은 이제 가상의 세계에서 환상의 세계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요즈음 거론되는 전자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물어보았다.

『스웨덴의 발전을 제3의 길로 보았듯이 전자통신 혁명에 의한 제4의 길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민주주의로 가는 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새로운 귀족정치가 나오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TV 채널을 바꾸고 컴퓨터를 작동한다는 점에서 과거와 같은 소외현상은 줄어들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계에 압도될 뿐 조종자는 아닙니다. 소외는 줄지만 정보수단의 소유로부터 멀어지지요. 이것은 상황의 악화일지도 모릅니다』

○계몽에 대한 새 사고 필요

마지막으로 나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파리 고등사회과학원의 자크 데리다를 만났다. 그의 「해체」(DECONSTRUCTION) 철학은 아직도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흔히 그를 탈현대의 대변자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런 자리매김에 대해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 지 궁금했다.

『나는 한번도 탈현대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합니다. 「프리 모던」, 「모던」, 「포스트 모던」의 단계설정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진영 사람들이 계몽의 전통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계몽이나 해방, 심지어 혁명에 대해 새로운 사고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봅니다. 메시아적 개념은 더 이상 불가능하지만 계몽의 다양한 유산을 재해석하고 여과시켜 전통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중요한 과제라고 확신합니다』

나는 이말에 매우 고무되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데리다와 하버마스를 연결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유럽의 오래된 비판적 문화유산위에서 현대 문명의 위기를 극복해가는 것이 가능하고 또 이것이 탈현대의 진정한 의미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글=한상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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