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분열틈새로 혁명봉기 지원”/식량·의복·주택 등 경제 어려워 동독 도움 기대/남북정치회담제의에 박 대통령 “제네바서 갖자”/남 지식인·종교인 등 반미구호 증폭 재미있어북한의 김일성과 호네커는 77년 20여년만에 북한과 동독간의 정상회담을 평양에서 가진 뒤 84년과 86년 상호 방문하며 평양과 베를린에서 각각 정상회담을 가졌다. 두 사람은 돈독한 친분관계를 바탕으로 자신들이 처한 어려운 처지와 주변정세에 대해 비교적 솔직한 얘기를 나누었음이 확인됐다. 특히 김일성은 북한경제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시인했고 팀스피리트 훈련이 북한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실토하기도 했다.<편집자주>편집자주>
▷77년 1차회담(12월9·10일 평양)◁
우리는 조국의 통일을 제1의 과제로 천명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세가지 과제에 주력하고 있다. 첫째는 북쪽의 공화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훌륭하게 성취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남한내의 혁명적인 투쟁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국제적인 혁명적인 힘들과의 연대와 결속을 발전시켜 가는 것이다.
남한은 수적으로 우리보다 인구가 많지만 사회적 본질로 볼때 결속이 이뤄질 수 없다.
물론 한반도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해 나가는 길은 쉽지 않다. 한국은 시민혁명을 겪지않은 뒤떨어진 식민국가였다. 동독은 발전된 국가로서 혁명을 수행했지만 한국은 봉건국가였던 나라로서 혁명을 겪어야만 한다. 그래서 한국은 민주적인 혁명과 사회주의적인 혁명을 함께 겪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이행기간이 상대적으로 길다.
남한의 혁명을 돕는 것은 주의해야 할 일이다. 이 문제는 가장 어려운 사안중 하나 이다. 왜냐하면 미제국주의자들이 남한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이후 남한에는 적지않은 혁명적 세력들이 있었다. 공산당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공산주의 당이 했던 것과 같은 방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외부적으로 중립적인 이름을 이용했다. 예를 들면 사회주의 진보당 같은 이름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적게 참여한 것은 오류였다. 사회주의 진보당의 인도아래 남한에서는 봉기가 조직되었고 이승만 정권을 전복시켰다. 이게 바로 4·19이다.
미국은 학생운동의 강화를 내버려둘 수 없어 박정희를 통해 군사정권을 세우게 했다. 박정희는 일제시대에 오카모도라는 일본이름을 가지고 빨치산활동을 하던 우리를 괴롭혔다.
남한 혁명운동의 약점은 노동계급의 세력이 충분히 집결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남북분단을 고착화하려 하고 있다. 일본은 한반도통일에 반대하고 있다. 일본은 한국이 통일되기보다는 분열되기를 바란다. 휴전선을 일본은 공산주의자로부터 보호해주는 장벽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남조선에서 박정희같은 인물이 아닌 민주인사가 집권하게 된다면 통일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이다. 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다. 우리는 적십자회담보다 정치적인 협의가 좋겠다고 제안했다. 박정희는 남북대표를 제네바에서 만나게 하자고 대답했다. 우리는 평양에서 하자고 했다. 박정희의 자문위원(이후락을 지칭)이 왔는데 그역시 CIA 남한지부 요원 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회주의 국가와의 협력면에서 볼 때 우리는 현재의 소련과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 중국과 북한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우리는 중국이 하는 모든 일에 찬성하지는 않는다. 중국은 문화혁명중에 1천5백km에 달하는 국경에 확성기를 설치하고 우리를 개량주의자라고 비난했다.
한편 우리는 중국을 비난하는 소련의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소련과 중국의 논쟁에 개입할 수 없다. 우리가 기회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런게 아니고 상황이 이를 허락치 않는다.
최근 수년간 북한경제는 어려움을 겪었다. 동독의 국제주의적 협력을 기대한다.
▷84년 2차회담(5월30일 6월1일 베를린)◁
7년전인 77년 호네커서기장의 방문에 답하기 위해 동독을 방문했다.
우리는 90년까지 80년대에 달성할 10가지 경제목표를 설정했다. 이는 우리의 경제수준을 개발도상국 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력 부족등으로 경제건설 분야에셔 몇가지 문제점에 부딪쳐 있다. 우선 노동력이 부족하다. 우리는 제국주의와 직접 머리를 맞대고 있어 많은 젊은 인력이 군대에 가 있다. 남조선에는 70만명의 군인과 4만3천명의 미군이 있다. 이에 맞서자면 우리는 40만∼45만명의 병력을 보유해야한다. 이는 우리에게 큰부담이 되고 있어 군병력을 감축해야만 한다. 또 노동력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기계화와 자동화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동독의 지원이 긴요하다.
여러분이 서독에 한 것처럼 우리도 남한에 대해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남한의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위험하다. 미군은 매년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레이건시대 이전에도 군사훈련은 있었으나 레이건 집권후 그 횟수가 늘어났다. 작년의 팀스피리트 훈련에는 미군 이외에 10만명의 남조선 병사가 참가했다. 우리는 미군이 10만명의 남조선 군사를 동원한데 대해 약간 놀랐다. 그래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올해는 미군이 20만명의 용병을 동원해 또다시 팀스피리트 훈련을 했다.
적군의 군사훈련이 있으면 우리는 이에 대응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는 우리의 생산에 커다란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우리는 군대수가 남한보다 적기때문에 이러한 훈련이 있으면 많은 노동자를 동원해야만 한다. 그러나 노동자가 동원되면 훈련기간인 한달반동안 노동력이 빠져야만 한다. 이는 매우 큰 손실이다.
미국 하원은 우리의 군대가 남조선보다 강력하다는 것에 관해 장기적인 논의를 하고 있지만 우리가 남조선보다 많은 병력을 가질 수 없다. 우리 인구는 1천7백만명이지만 남조선은 3천만명이 넘는다. 인구수도 그렇고 무기도 남조선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남조선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그들은 핵무기까지 가지고 있다. 우리가 군사적으로 우월하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는 결코 남조선을 침략할 수 없으며 그들은 병력을 증강시키기위해 우리가 군사적으로 강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카터대통령은 주한미군을 줄이겠다고 했지만 레이건은 오히려 증강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미국과 남북한이 만나자는 3자회담을 제의했으나 미국은 반대했다. 우리는 3자회담에서 미국의 속셈을 폭로할 생각이었지만 미국은 바로 이때문에 3자회담에 응하지 않았다. 남한은 휴전협정 서명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회담자격이 없다. 미국은 3자 외에 중국도 참가하는 4자회담을 하자고 했다. 중국은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기를 원치않고 있으며, 레이건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이에 대한 반대의사를 밝혔다.
▷86년 3차회담(10월19일 평양)◁
우리는 발전도상국으로 세가지 근본적인 문제와 대면하고 있다. 식량의 확보, 주택문제 해결, 의복문제 해결이 세가지 문제이다.
우리는 매우 작은 경작지만을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2백만㏊를 농업에 이용할 수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1백50만㏊ 뿐이다. 나머지 50만㏊는 경작이 어려운 산악지대이다. 우리는 30만㏊의 농지를 새로 만들어야 하지만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이 땅을 바다로부터 만들어야 한다. 남포갑문 프로젝트가 완공되었다. 댐 건설을 통해 우리는 바다로부터 유입되는 소금물을 차단할 수 있다.
우리는 병력중의 일부를 다른 대사업을 위해 투여하기로 결정했다. 남포 프로젝트는 30만명의 병사에 의해 완공되었다. 새로운 경작지를 곡물생산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면 인민에게 필요한 생계수단을 제공해 줄 수 있을것이다. 의복문제는 우리에게 면화가 없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주택문제는 모든것을 폐허 위에서 이룩해 내야했지만 건설사업에서 얻은 훌륭한 경험들을 이용하고 있다.
남쪽에서는 반미적인 분위기가 주민들 사이에서 증폭되고 있다. 시위자들의 슬로건을 보면 재미있다. 『미제 축출』이라는 구호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학생들은 『양키 물러가라, 미제정책 추종하는 군사독재 타도하자. 우리는 해방을 원한다』고 외치고 있다. 흥미있는 점은 종교계가, 그것도 전통적인 종교만이 아니라 기독교도들도 반미선전에 참여하고 있는 새로운 경향이다.
통일에 대한 요구는 민주세력 뿐만 아니라 학생들, 지식인들과 저널리스트들 사이에서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미국인들은 남조선에서의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우리는 국회 대표자회담과 불가침 선언에 합의할 것등을 제의했지만 남조선은 우리가 자신들을 공격할 의도를 지니고 있다면서 이를 거부하고 있다.
우리는 남한으로 밀고들어갈 의도가 없으며 그럴 능력도 없다.
우리는 남조선과 다양한 영역에서의 공식회담을 중단했다. 남조선 당국자들에게 『공식회담을 원한다면 군사훈련을 중단해야한다』고 말해왔지만 그들은 이를 원치 않았다.
남조선에는 1천개가 넘는 원자탄이 배치되어 있다. 두대만으로 우리나라 전체를 충분히 초토화 할수 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1천개가 필요하다는 얘기 인가.
나는 소·미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소·미관계가 진척되면 한반도 문제의 해결도 진척을 볼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통독정부 기밀문서 분석과정/주간한국 「김·호네커 대화」입수/49∼89년 북한현대사 중요자료
주간한국이 11일 입수한 구동독정부의 북한 관련 기밀문서는 북한의 현대사를 적나라하게 밝혀줄 수 있는 극소수의 1차자료중 하나이다.
러시아가 공개한 북한관련 외교문서는 자체의 기밀유지 시한에 묶여 60년대이전의 자료들로 제한돼 있다. 반면 구동독문서는 49년부터 동독이 붕괴한 89년까지 양국수뇌부가 주고받은 허심탄회한 속마음들이 그대로 담겨있다.
50여건 수천페이지에 달하는 이 문서들은 77년과 84년 86년등 김일성과 호네커 동독 공산당서기장의 3차례 정상회담, 84년 김일성의 소련방문에 대한 동독 정보기관 보고서, 89년 허담 북한 외교부장의 동독방문당시 헤르만 악센 동독정치국 위원과 나눈 대화록등이 망라돼 있다.
90년 통일후 독일 연방정부는 동독이 기밀로 분류해온 이 문서들을 입수해 자국내 북한전문가에게 위탁, 분석해 왔다. 방대한 문서들을 분류, 분석하는데 5년이나 소요됐는데 주간한국은 이 과정에서 문서중 대부분을 입수했다.
김일성과 호네커는 공산권의 지도자들중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처음 이들은 각각 중국과 소련의 입장에서 중·소분쟁의 틈을 좁히기 위해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나 만남을 거듭하는 동안 개인적인 신뢰를 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동독 붕괴후 러시아에 머무르던 호네커는 북한망명을 희망했었으며, 부인 마르고트도 칠레에서 호네커가 사망한 뒤 북한에서 여생을 보내려했었다. 붕괴직전까지 동독은 중·소를 제외하고는 북한의 최대 교역상대국이었다.
의전문제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김일성은 89년 동독이 김정일을 국가지도자로서 초청하도록 강력히 희망했던 것으로 구 동독정부 관계자들은 밝히고 있다.
이같은 양자간의 관계로 비추어볼 때 이들이 나눈 대화는 비교적 솔직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첫 정상회담에서 김일성은 대화를 거의 독차지하면서 호네커에게 일방적인 선전을 늘어 놓았다. 그러나 2차, 3차 회담에서는 팀스피리트 훈련으로 인한 경제의 침체, 다급한 식량사정등 고민을 솔직히 털어 놓았다.<유승우 기자>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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