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화요일 낮, 기자는 맨해튼 중심가를 걷고 있었다. 주차된 승용차 안에서 라디오를 듣던 한 흑인이 주먹을 치켜들며 『예스, 예스!』를 연발했다. 『낫 길티(무죄다)!』 길 건너편에서 흑인여인 특유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거리에 나와있던 모든 흑인들의 얼굴에 승리자의 기쁨이 출렁거렸다. 그러나 그 순간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백인청년으로부터 기자는 신음소리와도 같은 『쉬잇!(제기랄)』하는 한마디를 똑똑이 들을 수 있었다. 심슨평결이 있던 날 미국 한구석의 풍경화이다.혹자는 인종주의의 승리라고 했고 혹자는 돈의 승리라고 했다. 많은 흑인들은 「우리」가 이겼다고 했다. 억울한 희생자를 방지하자는 미국 사법제도의 개가라는 소리는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았다. 진실과 정의의 승리라고 말하는 사람은 변호인단 가운데도 없었다. 피해자 로널드 골드만의 부친은 『이 재판에서 패배한 것은 미국이다』라고 했다. 한 흑인 사회운동가는 『진실에는 관심도 없이 인종주의를 또다른 인종주의로 받아쳐온 흑인 자신들이야말로 패배자』라고 개탄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이번재판의 승자와 패자를 구별짓는데 심슨의 유무죄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점이다. 애당초 미국사회의 거대한 줄기를 이루고 있는 인종주의와 돈에 의해 치러진 잔치였다. 사실이나 진실은 눈에 띄지도 않는 초라한 손님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을 자신이 잘 알고 있을 미국인들이 평결에 집착했던 것은 마지막까지 스스로의 치부를 인정하기 거부했던 자존심 때문이었다는 것이 뒤늦은 생각이다. 하지만 심슨의 유무죄와 관계없이 승패가 결정났듯, 평결에 상관없이 심슨재판은 이미 3천만 흑인을 포함한 모든 미국인의 자존심에 큰 골을 만들었다. 평결이 있던날 흑인여성의 금속성 외침과 백인남성의 신음소리가 만들어냈던 극도의 불협화음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미국사회에서 쉽게 사라지기 힘들 것 같다.<뉴욕=김준형 특파원>뉴욕=김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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