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읽으며 발견한 것은 「죽은 아버지의 복귀」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암매장된 채 망각의 늪에 묻혀져 왔던 아버지가, 부성이 새롭게 가치부여를 받고 그 복권이 시도되고 있다. 주인석의 소설집 「검은 상처의 블루스」(문학과 지성사간), 윤대녕의 소설집 「남쪽 계단을 보라」(세계사간)는 각각 상이한 방식으로 이러한 주제에 참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죽은 아버지의 귀환이 내포하고 있는 문학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대로 80년대는 부친살해의 시대였다. 아버지는 억압적 권력의 화신에 다름 아니었으니 그를 죽이는 것만이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타개하는 유일한 길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주검 위에 펼쳐진 90년대 현실은 기대만큼 낙관적인 광경을 보여주지 못했다. 우리는 90년대문학, 특히 신세대문학에 가해진 숱한 비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신세대문학에 대한 비판이 명확한 사실진단과 분석에 의해 추진된 게 아니라 선정적인 방식으로 다분히 마녀사냥처럼 이루어졌다는 항변이 없지는 않았지만 일부 신세대문학이 보여준 경박함과 졸렬함, 그리고 상업주의와의 결탁은 보는 이들을 우려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주인석과 윤대녕의 최근 소설집이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중의 하나는 이들이 바로 이러한 현실을 작품을 통해 근원적으로 반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작가의 작품집을 읽으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요즘 젊은 작가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어른스러움」이었다.
그 어른스러움은 두 작가가 소설 속에서 아버지를 재발견하고 자신이 아버지에게 진 부채를 점검해보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검은…」에 실린 첫 작품 「옛날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단다」는 주인공 구보의 아비찾기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구보는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하면서 치욕과 영락의 대명사인 아버지를 떠올리고 글쓰기의 의미에 대해 반추한다. 그의 소설에는 아버지를 추방해버린 자리에 새롭게 자신의 터전을 세우고자 하는 젊은 세대의 지난한 노력이 담겨 있다.
첫 창작집 「은어낚시통신」과 장편소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를 통해 90년대문학의 대표주자로 떠오른 윤대녕의 경우 그의 소설이 가진 다면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논의가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와 도시적 감수성에 국한돼왔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민감한 독자들은 그의 소설이 현대적 감각으로 충만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정반대되는 의고적인 분위기가 그 저변에 깔려 있다는 점을 눈치챘을 것이다.
첫 창작집에 실린 「말발굽소리를 듣다」에 암시된 그 의고성은 이번 소설집의 「가족사진첩」 「새무덤」등의 작품을 통해 보다 확연히 그 정체를 드러내 보인다. 그것은 이 작가가 우리사회 전래의 가부장적 전통에 매우 친밀하며 아버지에서 자식으로 전수되는 삶의 예지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남진우 문학평론가>남진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