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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전면휴전·평화회담 합의/발칸 42개월 총성 멎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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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전면휴전·평화회담 합의/발칸 42개월 총성 멎으려나

입력
1995.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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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라예보 통행보장 등 조건이행 첫 관문금세기 최악의 민족분규로 얼룩졌던 보스니아에서 총성이 멎을 전망이다. 내전당사자들이 오는 10일부터 60일간 전면 휴전에 들어가는 한편 오는 25일께 워싱턴에서 평화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지난 42개월간 발칸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보스니아 사태가 본격적 평화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보스니아 내전 3개 당사국은 이미 지난달 26일 뉴욕에서 외무장관회담을 갖고 내전세력간 상호실체 인정및 공동의 대통령과 의회, 사법기관 구성이라는 평화원칙에 합의했지만 이후에도 전투는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뉴욕에서의 평화원칙 합의는 그간 실질적 내전 종식이 아닌 「수사차원의 수준」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려웠다. 그러나 내전 당사자들이 상대방에 대한 교전행위를 중단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이제까지 2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내전 종식의 결정적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이다.

보스니아사태가 무력에서 외교에 의한 협상국면으로 진전하게 된 배경에는 일단 미국의 강·온 양면외교가 절대적 힘을 발휘했다. 미국은 북대서양 조약기구(나토) 공군을 동원해 지난 8월말 세르비아계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단행, 궁지에 몰아넣는 방법으로 세르비아계를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빌 클린턴미행정부는 이와 동시에 리처드 홀브룩 국무부차관보를 특사로 한 「셔틀외교」로 내전당사자들간의 입장을 적절히 절충시켜 사태를 협상국면으로 전환시켰다. 클린턴행정부가 뒤늦게 보스니아 사태해결에 전력투구하고 나선 것은 대선을 앞둔 클린턴에게는 이번 사태가 그의 외교역량에 대한 중대한 실험대였기 때문이다.

물론 보스니아의 앞길에는 수많은 암초가 있다. 우선 세르비아계가 미국이 내세운 휴전성립의 선행조건을 준수할 것이냐가 첫 관문이다. 미국의 조건인 사라예보―고라주데 자유통행보장과 사라예보의 가스및 전력공급 재개는 이제까지 세르비아계의 최대압력수단이라는 점에서 낙관을 불허한다.

그러나 보스니아 휴전과 이어 개최될 평화회담을 계기로 발칸반도에 협상과 타협의 기운이 무르익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미 유럽연합(EU)과 미국은 보스니아의 경제복구를 위한 재정지원차원의 「마셜플랜」을 준비하는등 새로운 보스니아정부 출범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보스니아의 평화로 가는 길은 험난하지만 우리는 희망찬 발걸음을 내딛었다』는 클린턴대통령의 말처럼 발칸반도에도 희망의 빛이 선명해지고 있다.<이상원 기자>

◎미 세계경찰 위상 확인/러 영향력퇴조·유럽 한계노출/「휴전합의」 각국 역할로 본 국제질서

보스니아 내전은 탈냉전시대 강대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된 대표적 국지분쟁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휴전합의는 지역분쟁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갈등과 파워게임, 그리고 그 분쟁해법의 한 모델을 보여주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선 세계질서에서 여전히 미국의 역할이 절대적이라는 점이다. 이번 전면휴전은 미국이 주도한 북대서양 조약기구(나토)의 압도적 무력공세에 의한 압박전략과 이에 병행한 특사외교에 의해 가능했다.

반면 「유럽의 뒷마당」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영국, 독일등 서유럽국들은 종속적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이는 이들이 유럽의 이해에 바탕을 둔 공동노선을 펴지 못하고 각국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됐기 때문이다. 아직도 서유럽이 미국 없이는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한계를 드러낸 셈이다.

러시아의 영향력 퇴조도 두드러졌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이 지역을 세력권에 넣고 있었음에도 불구, 서방의 주도에 시종 수세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경제회복과 내부통합 및 이를 위한 서방의 원조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경제제재로 곤경에 빠진 세르비아공화국을 조종할 아무런 수단도 찾지 못한채 군부 강경파를 달래기에 바빴다.

냉전후 국제문제 조정자로 기대를 모았던 유엔도 근본적인 취약점을 드러냈다. 자위와 질서유지를 위해서만 무력사용이 허용된 탓에 한때 유엔평화유지군이 인질로 잡히는 수모까지 당했다. 더구나 공습결정권등 지휘체계의 혼선으로 무기력만 노출한 채 결국 나토에 임무를 넘기게 됐다.

독일이 전후 최초로 나토 역외에서 전투임무를 수행, 국제무대에 본격 데뷔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유엔 안보리상임이사국 진출과 유럽에서의 영향력 회복등 경제력에 걸맞는 외교적 위상을 갖추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배연해 기자>

◎휴전합의 주역·배경/클린턴,대선염두 적극적 외교공세 주효/특사홀브룩 “경제원조” 설득에 세공 수용 결정적

보스니아내전 당사자들이 전면휴전과 평화회담 개최에 합의한 것은 미국의 적극적인 평화외교정책이 주효한 결과다. 또한 내전당사자들도 이같은 평화해결에 따른 이해득실에 만족하거나 미국의 평화안을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내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인기만회에 골몰하는 빌 클린턴 미대통령은 보스니아사태 종식을 통해 국제분쟁의 해결사로서의 이미지를 심기 위해 그동안 제네바 평화회담, 세르비아계에 대한 북대서양 조약기구(나토) 공습, 휴전협의 등 사태해결의 큰 줄기들을 적극적으로 주도해 왔다.

클린턴의 이같은 평화외교 주역은 리처드 홀브룩 미국무부 유럽담당차관보. 「클린턴 행정부의 키신저」로 불리는 그는 지난 8월중순이후 미국의 유고평화사절단을 이끌고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세르비아공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보스니아대통령,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공 대통령 등 내전당사자들을 설득해 평화의 길로 유도했다.

보스니아 내전의 배후에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를 직간접으로 조종해온 밀로세비치는 보스니아 세르비아계가 미국의 평화안을 수용토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엔의 금수조치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경제를 부흥시키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된 밀로세비치에게 경제제재조치 해제, 전후복구및 건설에 필요한 경제원조 제공이라는 당근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밀로세비치는 세르비아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에게 세르비아계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내전을 지속하는 것이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득시켰다. 세르비아계가 장악했던 크라이나지역을 탈환, 승세를 잡은 투지만은 크라이나지역을 크로아티아 영토로 인정하는 미국의 평화안이 손해볼 게 없다는 입장이다.<조희제 기자>

◎보스니아 내전사/수백년간 종교·민족분쟁/티토 영도하 일시적 화합/냉전 붕괴후 고질병 재발

구소련 공화국들에 독립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 91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속해 있던 슬로베니아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공화국이 독립을 선포, 세르비아계 위주의 연방군이 슬로베니아를 공격하면서 내전은 시작됐다. 이어 92년2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하고 2개월뒤 보스니아 인구의 32%를 점하고 있던 세르비아계가 회교계 주도의 독립에 반발, 수도 사라예보를 공격하면서 내전은 2차 대전이후 최악의 분쟁으로 치달았다. 이후 보스니아 내전으로 통칭된 구유고 내전은 보스니아 인구 4백여만명중 절반가량을 난민으로 내몰고 20여만명의 생명을 앗아가면서 3년6개월간 계속돼 왔다. 길고도 끔찍한 내전뒤에는 화합하기 힘든 민족 구성과 누대에 걸친 반목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내전이 일어나기전 구유고 연방은 「1개의 연방, 2개의 언어, 3개의 종교, 4개의 민족, 5개의 국경, 6개의 공화국」이었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등 6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구유고 연방은 섞여 살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다민족 국가였지만 독립의 영웅 티토 대통령의 강력한 영도하에 별 분란없이 연방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80년 티토의 사망으로 통합구심을 잃게 되고 90년대 들어서 냉전구조가 붕괴되면서 다민족이라는 이질성이 연방이라는 동질성을 압도하는 시기를 맞게 됐다. 내전의 주무대였던 보스니아만 봐도 내전발발 당시 인구의 45%를 차지하고 있던 회교계와 그리스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계(32%), 가톨릭인 크로아티아계(17%)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게다가 이들 민족은 수세기동안 피로 점철된 반목을 겪어왔다. 14∼18세기 세르비아계는 회교도인 오스만 투르크의 혹독한 지배를 받았고 1차 대전이후 세르비아계의 탄압을 받아오던 크로아티아계와 회교계는 2차 대전중 나치에 협조, 세르비아계 수십만명을 학살한 바 있다. 원한에 원한이 겹치는 증오의 역사가 되풀이 됐고 이로 인해 보스니아 내전은 「인종청소」가 자행되는 등 끔찍한 양상으로 전개됐으며 쉽사리 해결되지도 않았다.

군사적 우위를 근거로 서방의 평화중재 노력을 조롱하던 세르비아계는 북대서양 조약기구(나토)의 대공습으로 수세에 몰리면서 타협으로 돌아섰고 때맞춰 후견인격인 세르비아 공화국도 3년여간 지속된 유엔의 경제제재에 굴복, 평화중재에 나서면서 보스니아 내전은 해결국면에 접어들었다.<윤순환 기자>

◎휴전합의 8개항

1. 보스니아 영토내에서 군사적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다음 합의를 준수, 휴전에 들어간다.

2. 세르비아계가 사라예보시에 대한 가스 및 전기공급을 재개할 경우 휴전은 10월10일 0시1분부터 발효한다. 그 시각 가스공급등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휴전은 가스공급등이 이뤄진 날의 자정에서 1분이 지난뒤 발효한다.

3. 평화 협상을 위해 휴전은 60일간 지속된다.

4. 각측 군사 지도자들은 저격을 포함한 모든 공격행위를 중단하도록 지시하고 지뢰설치도 금지해야한다.

5. 휴전발효일부터 각측은 모든 시민과 수감자들을 인도주의적으로 처우해야하며 유엔의 감시하에 모든 전쟁 포로들을 교환하도록 한다.

6. 유엔의 활동에 협력하고 위반사항을 유엔에 보고한다.

7. 사라예보와 고라주데간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한다.

8. 휴전기간에 각측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이동의 자유 및 신체장애인에 대한 귀향권등을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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