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공동체의식 아시아의 저력/전체 우선한 인권개념 개인중시 서구선 이해 한계/법「보살핌」 윤리로 동서 아우르는 새 비전 세울때○놀라운 경제성장 계속돼
21세기는 아시아·태평양 시대라고들 한다. 특히 동아시아의 의미는 막중하다. 일본은 이미 미국을 능가하는 생산성을 기록하고 있고 중국은 머지않아 세계최대의 경제대국이 될 전망이다.
한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는 개발도상국가의 모범이다. 아울러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도 근래 두자리수의 경제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아시아 전체의 경제적 약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흐름이 이 지역의 민주주의와 인권상황에 미칠 파장은 어떤 것인가. 아시아에는 원래 가부장 제도와 같은 권위주의 문화가 강한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와 인권의식을 함양하는 문화전통이 살아 있는 것일까. 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은 오늘날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아시아를 여행하면서 느끼는 점은 이 지역이 인종 종교 언어 관습 문화에서 너무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것이다. 중국 한국 일본같은 동북아시아와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등 동남아시아, 그리고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등 서남아시아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생긴 것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르다.
한 예로 인도네시아는 90%이상의 국민이 회교도인데 비해 필리핀은 가톨릭 국가이고 태국 캄보디아등은 불교국가인가 하면 중국은 유교문화의 전통이 강한 곳이다.
그럼에도 아시아는 오늘날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전반적으로 경제성장이 활기를 띠고 있을뿐 아니라 민주주의가 꾸준히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중동이나 남미대륙에 비해 아시아에는 독창적이고 뿌리깊은 문화가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요즈음 구미학계를 휩쓸고 있는 문화의 식민화와 탈식민화의 관점에서 볼때 서구및 일본 제국주의의 유산이 문제이지만, 그럼에도 서구문화에 정복되지 않은 장구한 문화유산이 동아시아에 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나는 이런 동아시아의 문화가 21세기 인류문명에 던지는 의미가 궁금하다. 미하버드대 교수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을 말한 바 있다. 저명한 문화비평가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를 비판하여 문화의 상호교류와 이해를 강조했다. 동아시아는 과연 어디에 서 있는가.
○동서 정치·문화갈등 증폭
이런 질문의 핵심에 있는 것이 아마도 인권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93년 방콕선언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인권개념을 둘러싸고 서구와 아시아 사이의 정치적·문화적 긴장과 갈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다행히 최근 일본 하코네(상근)에서 열린 「동아시아의 성장과 인권」이라는 주제의 국제 심포지엄에 참가할 수 있었다. 주최는 미국 카네기위원회. 이곳에서 아시아 각국의 동료와 전문가들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 모임은 앞으로 2년간 더 공동작업을 한 후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동양과 서양의 대결에서 흔히 싱가포르의 리광야오(이광요)전총리를 아시아의 선두주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아직도 인권을 서구적 개념으로 파악하여 동양문화에는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동양사상서 보편개념 나와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동양과 서양을 냉전적 사고로 양분하는 과거의 타성을 반영할 뿐이다. 오히려 중국의 맹자사상, 법적용의 보편성을 강조했던 법가의 전통, 우리나라 동학 사상등에서 보편적 인권개념을 추출할 수 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또한 중국이나 말레이시아 지도자들이 보여온 서구적 개념의 인권에 대한 도전도 기껏해야 한시적 임이 분명하다. 이들은 이른바 「개발권」이 개인의 권리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하여 정치적·시민적 권리를 유예시킬수 밖에 없다는 개발독재론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서구적 인권의 가치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빈곤이 극복된다면 인권도 존중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등은 경제성장을 위하여 반드시 유보돼야 하는가. 이를 경제발전의 지렛대로 활용하는 방법은 없는가. 아시아 권위주의 정부가 부딪치는 심각한 질문이다. 설사 그들의 주장에 현실적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어떤 권리를 왜, 어느정도 제한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이런 종류의 주장은 사실 권력의 도구로 전락하기 쉽다.
그럼에도 나는 대화를 통하여 서구 인권개념의 한계에 대해 터득하게 되었다. 서구문화는 개인주의 전통위에 서 있지만 동아시아에는 공동체 문화가 강하다. 인권의 목적이 결국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이라면 개인의 권리에 못지 않게 공동체 전체의 복리 건강 행복도 중요하다.
한 보기로 싱가포르에는 마약복용의 의심이 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찰 또는 이민당국자가 소변검사를 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결과가 양성이면 원상회복을 위한 치료가 강제로 행해진다. 이것은 서구적 감각에서 보면 사생활의 침해로 보이겠지만 아시아 문화로 보면 공공의 안전과 건강을 위하여 지불해야만 할 정당한 대가로 보일 수도 있다.
서구문화가 빠진 법 위주의 사고방식도 아시아의 정서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법은 인권의 최후 보루이고 따라서 필요하지만, 문제를 법으로 해결하기전에 가족 지역 직장등 공동체의 도덕적 기준이나 상식·관행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아시아에서는 선호한다. 일본 도쿄(동경)대 법대 오누마 야스아키교수는 법위주의 문화는 일본인에게도 그리 익숙한 것이 아니라고 진단했다.
일본의 평생고용제도도 마찬가지다. 도쿄대 법대 요코타 요조교수는 이 제도가 원래 법적인 권리로 출발했다기 보다는 일본 특유의 집단주의 문화에 의하여 노사관계의 관행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말했다. 이 관행이 기업의 도덕적 의무가 되고 실제로 존중되면서 노동자의 인권이 신장되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잠재력은 경제성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공동체 문화의 유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문화의 핵심에 「보살핌(care)」의 윤리가 있다. 가족 친구 직장 학교 민족은 이런 보살핌의 도덕적 관계를 나타낸다. 법과 보살핌은 물론 상호 보완적인 것이다.
공동체 수준의 보살핌의 윤리가 없이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려면 매사가 관료화하고 코스트가 높아지며 인간관계가 딱딱해진다. 반면 법적 보호장치가 없이 보살핌의 윤리에만 의존하면 전통적인 온정주의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둘다 필요하다.
○불교,환경운동도 이끌어
아시아의 강점은 서구 문명이 많이 상실한 공동체 문화가 강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태국이나 캄보디아에서 보면 불교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보살핌의 윤리를 역설할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의 권리를 옹호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인권운동과 함께 생태계의 권리개념으로 환경운동을 선도하고 있다.
유교의 새로운 해석도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가족공동체에서 볼 때 효도는 자녀의 도덕적 의무일뿐 아니라 연로한 부모는 자녀의 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부모를 양로원으로 보내는 것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적지 않은 고통을 수반한다. 이런 문화에 근거해서 동아시아는 서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노인의 인권과 복지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단순한 전통의 회복이 아니라 법 위주의 형식주의를 넘어 「포스트 모던」한 발전 방향을 잡는 노력이 필요하다. 즉 근대문명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6월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가 주최했던 국제심포지엄 「세계의 관점에서 본 한국문화」는 실로 유익한 토론이었다. 로널드 잉글하르트, 찰스 레머트, 스콧 래시, 프레드 달마이어 등 「포스트 모던」문화변동을 탐색하는 일급 이론가들이 모여 한국문화의 탈식민지화와 함께 우리의 문화유산이기도 한 보살핌의 윤리를 다각적으로 검토했기 때문이다.<글=한상진 교수>글=한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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