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증없는 정황 증거 무용” 확인/“경관 인종차별” 쟁점 부각 먹혀/폭동촉발 우려감도 작용한듯『정황증거는 충분한데 결정적 물증이 없었다』 『배심원들은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무죄추정」이란 원칙에 충실했다』
심슨사건 재판을 추적해온 전문가들은 무죄 평결을 결정적 증거부족과 배심원의 엄격한 판단이 어우러진 합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재판에서 검찰측은 72명의 증인과 7백23건의 증거를 내세워 심슨의 유죄를 「정황적」으로 증명했지만 범행에 쓴 흉기나 목격자 증언등 확증을 제시하지 못해 이 약점을 물고 늘어진 변호인단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검찰측은 재판에서 ▲심슨이 전처 니콜의 장례식후 검찰출두 약속을 어기고 도주한 사실 ▲사건당시 알리바이(현장부재증명)를 입증하지 못한 점 ▲심슨의 집근처에서 발견된 피묻은 장갑과 유전자(DNA)감식결과 ▲심슨의 상습적인 부인폭행을 입증하는 녹음테이프등을 유력한 증거로 제시했다.
이에 대해 「드림 팀」으로 불렸던 막강 변호인단은 『공격은 최상의 방어』라는 전법으로 소극적 방어보다는 적극적 공세를 펼쳤다. 도주사실에 대해서는 『아내가 살해돼 정신이 나간 사람이 이성적 판단을 할수 있겠는가』라고 되물었고 구타 전력에 대해서도 『가정폭력이 살인으로 연결된다면 칼부림 안날 가정이 얼마나 되겠는가』라고 받아쳤다.
변호인단은 특히 검찰측이 확실한 물증으로 자신하던 피묻은 장갑과 DNA테스트결과를 집중공략, 전세를 뒤집는 「개가」를 올렸다.
변호인단은 피묻은 장갑을 발견한 경찰관 마크 퍼먼이 지독한 인종주의자임을 나타내는 녹음테이프를 찾아내 이번 사건을 「인종차별적 음모」로 몰아붙이는데 성공했다. 평결에 참여한 백인배심원 2명중 60대 여성이 귀가후 가족들에게 『퍼먼때문에…』라며 울먹였다는 보도는 퍼먼이 평결에 미친 결정적 영향력을 암시한다. DNA테스트 결과도 변호인단이 동원한 노벨의학상 수상자와 세계적 법의학자가 증거능력을 부인, 일순간에 무용지물이 됐다.
흑인폭동에 대한 우려가 무죄평결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세계가 이 재판을 주목하고 있다』는 최후변론은 배심원들에게 92년 LA흑인폭동을 일깨우는 압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공정·획일성 문제점 부각/“비전문가 판단” 배심원제 논란/1∼2명만 매수해도 재판 결정적 영향/개인적 편견·법률적 무지로 오판소지도
심슨재판을 계기로 미국의 배심원제도가 새삼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배심원제도는 법률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유무죄여부를 결정하는 영미법계통의 사법제도. 12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기소항목에 대한 유무죄 여부를 판단하고 판사는 형량만을 결정한다.
형사재판의 경우 배심원 전원이 일치된 의견을 보여야 평결이 이루어지고 한명이라도 반대하면 평결불능이 돼 그 사건은 재심대상이 된다. 민사재판에서는 책임과 손해배상에 관한 문제를 대체로 과반수의 평결로 결정하는 것이 형사재판과 다른 점이다.
논란의 핵심은 형사재판에서 전원일치의 평결이 갖는 공정성과 획일성의 문제다. 배심원 한 두사람만 매수하더라도 평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개인적인 편견과 법률에 대한 무지로 그릇된 판단을 내릴 위험도 크다. 또 인종·성차별문제등이 뒤엉킨 사건에서는 심리적 동요와 개인적 배경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심슨재판도 12명의 배심원중 9명이 흑인이어서 인종적 구성이 흑인인 심슨에게 유리할 수 밖에 없었다는 뒷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재판이 끝나자 미국의 법조계는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서조차 「비전문가들이 중요한 법적판단을 내리는 것이 과연 올바른가」라는 의문이 제기된 것도 그만큼 배심원제도의 비효율성과 불공정성이 부각됐기때문이다. 「상식인에 의한 법의 지배」라는 배심원제도의 정신에도 불구하고 변호사들이 배심원의 동정심과 감성에 호소할 소지가 많아 능력있는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는 피고인의 경제적 능력이 재판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도 나와 있다.
미국의 형법전문가들은 형사사건에서 배심원들이 무죄평결을 내리면 검찰측이 상급법원에 항소할 수 없도록 규정한 법률도 지나치게 피의자의 인권만을 존중하고 피해자의 인권은 도외시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선거인명부나 운전면허자 명단을 보고 미국 성인 시민권자중에서 무작위로 선정하는 배심원 구성방식도 문제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 집단에 의해 행해지는 재판이 아니라 법률 문외한들이 모여 내리는 「아마추어 평결」때문에 미국이 배심원들의 성향에만 신경쓰는 변호사들 천국이 되고 말았다는 지적이다. 미국의 법조계 일각에서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규명보다 변호인단과 검찰측의 심문기술에 좌우되는 미 소송제도 자체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이창민 기자>이창민>
◎심슨 재판이 남긴 문제점/유·무죄떠나 흑백갈등 내연/미 사회 고질병 노출… 상업주의도 기승
미국민들은 3일(현지시간) O J 심슨에 대한 무죄 평결을 둘러싸고 양분됐다. 단순한 유무죄 공방이 아니었다. 열이면 열, 흑인들은 심슨의 무죄평결에 환호했고 백인들은 소리없이 경악했다.
심슨재판이 미국사회에 남길 후유증은 단번에 자명하게 드러났다고 할 수있다. 미국사회가 안고 있는 인종문제는 그동안의 어떤 치유책에도 불구하고 미해결 상태로 잠복돼 있었음이 이번 재판 과정에서 다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심슨재판의 쟁점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검찰측의 증거들이 조작됐는지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검찰측이 가장 유력한 증거로 제시했던 심슨의 피묻은 장갑은 현장수사경찰이 일부러 갖다놓은 것이고 현장에서 발견된 심슨의 혈흔 역시 경찰이 뿌려놓았다는게 변호인단 변론의 가장 큰 줄기였다. 변호인단의 이 가설에는 수사경찰이 백인이고 인종주의자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실제로 재판 막바지에 이 경관의 법정증언은 위증이었고 그가 인종주의자임이 판명됐다. 이는 검찰측의 증거능력에 치명타였고 변호인단의 「인종카드」는 성공을 거두었다.
또하나 심슨 재판에 대해 여론이 열중했던 것은 미식축구, 대중스타, 무명흑인의 아메리칸 드림, 미모의 백인 전부인, 흑백커플, 할리우드, 돈, 살인, 치정, 가정폭력등 미국인들의 관심을 끌만한 모든 요소가 이 사건에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적 상업주의가 기승을 부린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 수도 있다. 애당초 법정의 정의는 미국적 상업주의앞에 무색해 질수 밖에 없었다는게 미국사회 스스로의 냉소적 자가진단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재판은 미국 사법제도가 대중과 여론에 얼마나 취약할수 있는가를 드러낸 사례로 기록될만하다. 뉴욕타임스는 이에 대해 『심슨재판은 미국의 사법정의에 오점을 남겼다』고 통렬히 지적했다.<뉴욕=조재용 특파원>뉴욕=조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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