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계절이다. 올해엔 윤8월이 들어서 여름이 길거라고들 해서 미리 겁을 내고 있었더니만 예년과 다름 없이 처서가 지나자 더위는 한풀 꺾이고 일교차 심한 9월, 상쾌한 10월을 맞았다. 지나놓고 생각해보니 여름이 길려면 윤8월이 들어야 말이 되는데 왜 윤8월을 그렇게 갖다붙였을까? 음력으로 윤자가 들어가는 달은 안좋은 쪽으로 갖다붙여 버릇한 인습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윤달은 예로부터 하지말라는게 많은 달이다. 그러나 예전에도 윤달에 아기를 낳으면 『생일을 제 날 못찾아 먹겠군』 하는 정도로 가볍게 섭섭해 했지 아기에게 해로울지도 모른다는 식의 사위스러운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 생일을 거의 양력으로 해주게 된 오늘날에 도리어 윤달에는 아이를 안 낳으려고 계획을 세우는 주부까지 상당수 있다고 한다. 내 아이에게는 최고의 것, 완벽한 것을 줘야 한다는 요즈음 엄마들의 생각이 생일도 완전한 두개의 생일을 주고싶다는 데까지 미쳤다면 참 안됐다. 일년중 가장 풍요하고, 밝고, 상쾌하여 가장 살맛나는 달, 우리 시조 단군이 태어나시고 개국하신 이 좋은 달이 단지 음력으로 윤달이 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이도 못낳을 달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젊은 엄마 나무라서 무엇하랴. 엊그저께는 나와 비슷한 연배들이 만나 흉허물 없는 얘기를 하다말고, 계절 탓도 있었겠지만 어떻게 죽는 게 가장 좋을까하는 약간은 울적한 얘기를 하게 됐다. 친구 하나가 느닷 없이 『참, 윤달 든 해에 수의를 준비해야지』 하고 서둘렀다. 워낙 격식을 차리는데 빈틈이 없고, 또 효성도 지극해서 시댁 친정 동기간을 규합해 양가 부모 수의를 미리미리 마련해놓았다가 옛날 격식을 최대한 되살려 장례를 치른 것을 알고 있는 우리들은 그가 또다시 수의타령을 하자 어디 감춰놓은 서모라도 생존해 계신가 했다. 그러나 듣고보니 그게 아니라 이제 슬슬 우리 자신의 수의를 마련해놔야 하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내가 놀란 것은 올해는 좀 이르지만 이 다음에 돌아오는 윤달엔 생각해봐야지 않겠느냐는 친구들 모두의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내 수의라니, 섬뜩하고 생급스러웠다. 나라고 안죽을 것 같아서 그런 준비성이 생급스러웠던 게 아니라, 수의는 생전에 미리 장만하든, 사후에 부랴부랴 장만하든지간에 자식이 부모를 위해 장만하는 것이지 본인이나 입자고 장만하는 건 아니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식이 효도삼아 미리 장만한다고 해도 살아계신 부모에게는 암만해도 죄송스러워, 『수의를 미리 지어 놓으면 오래오래 사신답니다』라고 위로하며 될 수 있으면 축제분위기 속에서 그것을 짓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격식이 지엄하고 물자가 귀하여 준비없이 장례 치르기가 겁나던 시절, 수의를 미리 장만해놓는다는 것은 자식의 도리로도 한시름 크게 더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의장만하는 것쯤 그렇게 큰 부담이 안될 것이 분명한 자식을 둔 부모가 나 입자고 수의를 장만하고자 하는 뜻 역시 갸륵하고도 넘치는 자식효도에 근거하고 있었다. 졸지에 일을 당하여 너무 당황할까봐, 장의사한테 바가지 쓸까봐 염려스러워서, 부모 수의 잘 해드려 정성껏 전송하고난지 불과 몇해만에 스스로의 수의를 장만하여 자식의 시름을 덜려는 우리 세대의 못 말리는 아래 위 효도는 아름답다기보다는 지겨웠다.
우리가 자식을 뱃속에 넣고 이 세상에 오기를 기다릴 때 얼마나 설레는 마음, 찬란한 기쁨, 경건한 기도로 아이의 배내옷을 꿰맸던가. 이 세상에 온 후엔 또 얼마나 기쁘게 맞았으며 좋은 것을 먹이고 편하고 예쁜 옷을 입히기 위해 얼마나 힘든줄 모르고 일했던가? 그렇게 기른 자식한테 이 세상 하직할 때 옷 한벌 못 얻어 입을건 또 뭐란 말인가. 요새 자식들이 효도할 줄 모른다는건 거의 상식처럼 돼버렸지만 우리가 요구하지 않으니까 못받는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좀 치사한 비유인지도 모르지만 울지 않는 아이 젖주랴는 말은 자식이 부모한테도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닐까.
그저 공부만 잘해라 그게 효도라고 하고 기르다가, 그저 너 하나만 잘되면 그게 효도다 하다가, 그저 너희만 잘 살아라, 부모신세 안지는 것만도 효도다, 그렇게 키워놓고보니 도무지 받을 줄만 알지 줄줄을 모르는 자식들을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그 벌로 자식한테 옷 한벌 못얻어 입고 떠날 채비를 해야 되는가. 우리 또래의 노인이 얼마나 잘났는지는 모르지만 그 모양이 쓸쓸하다.<박완서 작가>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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