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적 분리 독립 “절반의 성공”/많은 내홍불구 「1국가」 민주적해체 “유럽 문화전통 승리”/보스니아 내전으로 엄청난 비극 겪는 유고와는 대조적체코의 바츨라프 하벨대통령은 93년 10월 8일 빈에서 열린 유럽의회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했다. 『공산체제의 붕괴에 따른 탈냉전 시대를 맞이하여 유럽은 새로운 문명을 건설할 호기를 얻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토대위에서 유럽 시민사회를 건설하고 다윈주의 속에서 각 국가의 개성과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지난 90년 우리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은 점점 요원해지고 있다. 관세나 수입쿼터, 이자율에 관한 기술적 협상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미래를 다시 보는 새로운 에토스, 감수성, 의지가 필요하다』
유럽의 현 상황은 어느 의미에서 뒤숭숭한 것 같다. 모순적인 현상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유럽은 근대문명의 선구자답게 미래의 새로운 비전을 모색하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유럽통합의 길은 좋은 본보기일 것이다. 그러나 동구권을 포함하여 많은 나라들에서 민족문제, 인종문제가 다시 가열되고 있다. 특히 발칸반도의 민족갈등은 심각하기 짝이 없다.
프랑스만 하더라도 실업자가 늘고 있고 이민노동자에 대한 억압이 가중되고 있다. 파리의 지하철, 노천시장등에서 폭탄이 터지고 테러가 늘면서 모든 공중쓰레기통이 밀봉된 상태에 있다. 근래 개봉된 「증오」라는 영화는 파리 근교 슬럼가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에스컬레이션을 해학적으로 잘 보여준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내가 만난 일군의 전문가들은 보다 구조적인 원인을 강조했다. 예컨대 세계화의 추세가 가속화하면서 근대사회의 통합력이 급속히 쇠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파리 고등사회과학원의 비비오르카교수는 국가도, 산업도, 민족도 더 이상 과거의 통합기능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사회의 균열은 다시 커지고 있고 집단들은 파편화하면서 폭력의 사용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일군의 전문가들은 민족집단을 둘러싼 억압된 욕망의 분출을 강조했다. 유럽에는 원래 다양한 민족이 섞여 살고 있다. 특히 동유럽의 민족지도는 매우 복잡하다. 언어 전통 종교 역사가 다른 민족집단들이 2차대전 이후 소련의 영향력아래 인위적으로 특정국가에 편입되었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후 이들 소수 민족이 독립을 요구하면서 오늘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민족은 문화적 공동체
그러나 민족은 혈통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가꾸어진 공동체라는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핵심적인 것은 집합적 기억의 역사이다. 과거가 어떻게 만들어졌느냐에 따라 현재와 미래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해 출신배경이 다른 부부라 하더라도 같이 살면서 서로 돕고 의지하는 아름다운 기억을 쌓아가면 관계는 튼튼해 질 것이다. 그러나 도저히 살 수 없을만큼 이질적인 관계임을 반복해서 경험한다면, 헤어질 가능성이 높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체코와 유고의 비극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나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민족연구 전문가들을 만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종식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라는 점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74년간 존재했던 국가가 92년 12월말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쪼개진 것은 분명 실패지만 전쟁이 아니라 평화적 방식으로 합의 이혼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것은 성공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양쪽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안에 유럽문화의 전통이 살아있음을 자랑스러워했다.
유고슬라비아의 경험은 이와 정반대이다. 티토의 정치적 리더십과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으로 한때 세계의 관심을 끌었던 유고가 91년 붕괴되면서 크로아티아 공화국에서 시작된 6개월간의 전쟁에 이어 오늘날 계속되고 있는 보스니아 내전은 전세계의 비탄과 탄식을 가져왔다.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사이의 불신도 무섭지만 보스니아에 거주하는 회교도의 희생도 심각하다.
○세계 곳곳 민족주의 돌풍
우리는 여기서 탈냉전 시대의 역설에 직면한다. 공산주의의 붕괴와 함께 민족주의의 돌풍이 세계 도처에서 일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밑바닥에 있는 것이 바로 민족적 정체성이요, 집합적 기억의 문제이다. 모든 민족집단이 영토적 주권 국가를 가지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유럽 여러나라에 흩어져 있는 집시들, 인도로부터 나온 「로마」라 불리는 소수민족은 모국이 없고 정치적 목표가 없기 때문에 더욱 냉대를 받는 유랑족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와 전통이 다른 민족이 한 국가를 이루고 있을 때 이들이 기존 체제에 융합되지 못한 채 분리를 주장하게 되면 근본적인 위기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이 위기는 어느 의미에서 근대 문명의 위기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국가의 권리로서 영토적 주권과 민족이 누려야 할 자결권이 날카롭게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민족 집단간의 유혈 충돌만이 아니라 무자비한 학살이 뒤따르고 있다. 부트로스 갈리 유엔사무총장이 최근 「평화의 아젠다」에서 국가와 민족의 권리가 배타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한 것은 시사적이다. 서구사회는 이 문제를 오래전에 해결한 것으로 믿었으나 이는 착각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경험은 특히 암시적이다. 사실 이 나라는 동유럽에서 가장 개명된 나라였다. 1918년 출범한 이래 나치가 점령하기까지 의회 민주주의를 꽃피웠고 산업도 가장 잘 발전시킨 나라였다. 68년 「프라하의 봄」에 드러났듯이 공산치하에서도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의 열정은 살아있었다. 더욱이나 이 국가의 주된 축인 체코인은 슬로바키아인에 대하여 줄곧 포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따라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역사를 만들어낸다면 더불어 사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한 측면이 많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런 역사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다.
○정치적 열망 서로 달라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서로 열망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한 최초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구는 1천2백여만명. 그 가운데 체코인은 7백여만명, 슬로바키아인은 2백여만명, 그리고 3백여만명은 독일계였다. 그런데 이들 수데텐 지역의 독일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정통성을 부정할 뿐 아니라 나치즘을 전폭 지지하면서 히틀러의 제3제국에 병합되기를 원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체코는 슬로바키아를 포용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슬로바키아는 자신의 독자적 영향력을 늘리는 기회를 찾았다. 히틀러는 뮌헨 회담을 통해 수데텐 지역을 병합했고 산업중심지 체코를 점령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부추기면서 이럴 경우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1939년 3월 나치가 체코를 침공하기 하루전에 슬로바키아는 드디어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고는 나치의 괴뢰정부로서 슬로바키아의 국가건설을 나름대로 추진했다.
89년 공산체제가 무너진 후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또 다시 다른 길을 걸었다. 체코의 클라우스 총리는 단연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포함한 경제개혁에 박차를 가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결과에 회의적인 슬로바키아의 메시아르총리는 체코가 일방적으로 나갈 경우 자신들은 분리 독립할 것을 여러번 언명함으로써 민족주의 운동에 불을 붙였다. 더욱이나 독립국가의 기억이 없는 슬로바키아는 나치와 소련의 후원으로 국가를 건설했던 과거의 기억을 미화시키는 레토릭을 썼다.
이것은 체코인에게는 불쾌할 뿐 아니라 충격적인 일이었다. 자신들에게는 억압과 박탈, 울분으로 기억되는 역사가 슬로바키아에게는 독립과 명예, 자존심으로 기억된다면 둘 사이의 대화는 확실히 어렵기 때문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경험은 경제발전 수준이 다르고 정치적 목적이 다른 두 민족집단이 연방제하에서 공존하기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국가를 해체시키고 민족자결권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유고의 비극과는 너무도 다르고 또 유럽 문화의 긍지를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한상진 서울대 교수>한상진>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