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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마을 레제페스의 축제(지구촌시대의 문화변동: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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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마을 레제페스의 축제(지구촌시대의 문화변동:5)

입력
1995.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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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자긍심 지방문화가 키웠다/전국서 모인 관객어울려 대서사극 감상모습 인상적/미 TV·영화등 패권주의 거부하는 숨은힘 실감케남미에서 2주를 지낸 후 나는 뉴욕을 거쳐 파리로 왔다. 유네스코 학술회의가 열리는 테헤란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파리에서 비행기 수속을 하는 과정에서 회의가 연기됐다는 말을 들었다. 일정을 다시 확인해 비행기를 타라는 말을 들었으나 공교롭게도 이날이 이란의 국경일에 주말이 겹쳐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 파리 유네스코 본부도 이에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망연해하고 있는데 프랑스 지방 문화의 현장을 탐방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프랑스의 시골은 전혀 가본 적이 없었던 나는 기쁨 속에 모든 것을 잊고 주말 여행을 떠났다.

○3만인파 공연장 빽빽이

우리가 간 곳은 프랑스 중서 해안지역 방데(Vendee)의 레제페스라는 시골이었다. 방데는 프랑스 대혁명때 혁명군과 왕당파가 번갈아가며 들고 일어나 접전했던 역사의 현장. 이같은 역사를 재현하는 장대한 야외극 「르퓌이뒤프」가 레제페스에서 공연되고 있어 이를 보러 가기로 했다. 레제페스는 파리에서 서너시간 걸리는 거리였다. 그러나 중간에 프와티에, 니요르등 중세시대의 교회들과 유적들을 둘러보느라 저녁이 돼서야 방데읍에 도착했다. 숙소에 여장을 푼 뒤 레제페스를 향해 다시 버스에 몸을 싣고 어둠속을 한참 달렸다.

이런 시골 산속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의아스러웠다. 그러나 막상 현지에 도착했을 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아무 것도 없는 첩첩 산중 시골마을에 프랑스 전역에서 모여든 수백대의 버스가 정차해 있었기 때문이다.

족히 3만은 넘는 인파가 이미 야외 스타디움을 꽉 채우고 있었다. 야외 공간에는 연못이 있었고 그 너머에는 부서진 성곽의 실루엣 같은 것이 어둠속에 보였다. 공연은 밤 10시가 넘어 시작됐다. 내용은 중세 농민의 비참한 생활상으로부터 시작하여 프랑스 혁명과 반혁명을 거쳐 자유와 평등의 근대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었다. 앞의 빈터와 뒤의 성곽 그리고 가운데의 연못을 이용하여 수많은 혁명군이 말을 타고 질주하고 전쟁이 일어나며 대포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혁명군의 함성에 이어 왕당파의 그레고리안 성가가 성곽에 울려 퍼졌다. 그런가 하면 소 말 돼지 같은 가축과 함께 농민들의 축제가 열리곤 했다.

이 공연에 출연하는 2천여명의 농민 군인 어린이들은 모두 이곳 주민들이라고 한다. 금세기 초에 발굴한 지방사를 토대로 78년부터 시작된 이 공연은 오늘날 유명한 지방축제가 되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시골 산중의 성곽에 모여들어 깜깜한 밤에 조명예술과 영상기법의 도움으로 대서사극을 감상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공연을 보고 지구촌 시대의 지방문화에 대해 새로운 감각을 얻게 되었다. 이 문화를 표준화된 문화로 보는 것은 무엇인가 경박스러운 것 같다. 세계 어디를 가건 호텔이며 음식 교통 통신 음악 취미 복장에 이르기까지 표준화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부르조아의 닫힌 세계를 반영할 뿐이며 문화는 훨씬 더 다양하고 지역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프랑스 문화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에 저항하는 몸짓이 강하다. 미국 문화의 상징인 디즈니랜드가 영업에서 고전하고 있는 곳은 오직 프랑스뿐이다. 케이블 TV도 이곳에서는 실패했고 빌 게이츠의 「윈도 95」 신프로그램이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했을 때 프랑스에서는 별다른 바람이 불지 않았다.

여기에는 프랑스인의 문화적 자존심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파리는 유럽문화의 본고장이자 미국의 패권주의에 도전하는 특유의 전통이 강하게 배어있는 곳이다. 유럽이 2차대전의 참화로 폐허가 되었을 때 파리만은 그대로 보전되어 궁전이며 박물관같은 문화재와 건축물들이 파리를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통일이후 독일이 동유럽을 포함한 유럽 전체의 맹주로 부상할 전망이지만 프랑스인의 높은 문화적 자존심을 따라갈 방법은 없다. 유럽문화의 중심은 역시 파리다.

○젊은층엔 레게 등 급속유입

국제화와 세계화의 시대에 프랑스문화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문화의 세계도 유심히 살펴보면 동태적이다. 어떤 것은 배면으로 숨고 어떤 것은 전면에 떠오른다. 프랑스하면 많은 사람은 한때 샹송을 생각했지만 이것은 오늘날 사라지고 있다. 몇시간이 걸려 식사를 하는 프랑스 음식문화의 전통도 많이 변하고 있다. 그러나 바캉스에 대한 집념과 애착은 아직도 강하다. 젊은 세대에게는 레게음악이 인기를 끌고 일본문화의 도입도 빠르게 이루어 지고있다.

지구촌 시대 문화변동의 핵심을 소르본대학의 미셸 마페솔리 교수는 새로운 「부족주의」의 부활로 압축했다. 거대한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신화가 사라지고 인간과 자연을 정복하는 과학 기술문명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인간의 자아실현과 친밀성을 강조하는 공동체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이런 경향이 특히 프랑스에서 강하다고 진단했다. 도빌의 영화제, 아비뇽의 연극제처럼 지방문화의 유산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특히 금년은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처음 만든지 1백주년이 되는 해로서 다양한 영화제가 전국적으로 열리고 있다. 파리에 있는 영화관만 해도 4백개가 넘는다. 장르별, 분야별로 영화를 모아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곳도 많다. 얼마전 퐁피두 센터에서는 한국영화제가 성대하게 열린바 있다. 케이블 TV는 안되지만 카날플뤼스라 불리는 유료 영화방송 채널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는 왜 프랑스가 대중의식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영상산업에 대해서만은 개방을 반대하는 가를 이해할 수있다. 정부는 영화진흥기금을 늘리고 상업방송의 일정한 이윤을 영화진흥에 쓰는 등 영화산업에 적극적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직 불투명한 것 같다. 프랑스의 문화적 자존심을 걸고 많은 돈을 들여 제작했던 졸라의 노동운동 영화 「제르미날」이 미국영화 「쥐라기공원」과의 경쟁에서 참패했기때문이다. 프랑스는 영화에 사상을 집어넣으려 하지만 정작 흥행에 성공하는 작품들은 이것이 없는 흥미위주의 미국영화가 더 많다.

프랑스가 미국에 수출하는 격조있는 문화로는 「부이용드 퀼튀르」라는 국영방송 2채널의 프로그램이 있다. 이것은 매주 금요일 밤 10시에 베르나르 피보라는 언론인이 시청자에게 좋은 책과 저자를 소개하는 프로이다. 딱딱하고 흥미가 없을 것 같지만 피보의 식견이 워낙 탁월하고 저명한 지식인들이 나와 토론하기때문에 시청률이 매우 높다. 말하자면 좋은 저자, 좋은 독자, 좋은 언론이 잘 어우러진 본보기이다.

세계화시대에 프랑스의 문화정책은 여러가지로 주목할 만한 것이다. 프랑스에 문화부가 처음 생긴 때는 1959년이고 초대장관은 유명한 앙드레 말로였다. 그는 문화사업으로 프랑스의 꿈과 영광을 되살리고자 헌신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프랑스 문화의 우월성이 아니라 독자성이었다.

○자크랑 전장관 진흥책 적극

그다음으로 유명한 장관은 미테랑 정부시절 문화정책을 이끈 자크 랑이다. 그는 10년간 재직하면서 문화부 예산을 2배로 늘렸고 현대적 문화공간의 확충을 위해 다양한 음악축제, 프랑스 대혁명 2백주년 기념행사, 바스티유 오페라 창설, 제2의 개선문으로 불리는 그랑다르쉬 건축및 퐁피두 센터의 문화공간화를 추진했다.

퐁피두센터는 모든 기둥이 건물밖으로 나와 있어 흉측스럽게 보이기도 하지만 안에서 보면 공간이 매우 넓고 효율적이다. 이 공간을 임의로 나누어 쓰기도 하고 터쓰기도 한다.

프랑스나 남미같은 라틴계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특이한 감수성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빈틈없이 꽉 짜여져 돌아가는 시간보다도 느슨한 시간을 즐긴다. 서로 아귀다툼하는 경쟁적인 인간관계보다는 정서적이고 표출적이며 심미적인 가치를 존중하고 즐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세계정복적인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회의와 거부의 뜻이 숨어있다.<글=한상진 교수>

□편집자주:한상진 교수는 이란문화현장도 탐방할 예정이었으나 참석하려던 테헤란 학술회의가 주최측 사정으로 연기돼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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