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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이전의 경제·사회상」 통계청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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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이전의 경제·사회상」 통계청 발표

입력
1995.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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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농업종사… 연성장률 3.7%/1인당 토지보유 한국인 1정보 일본인 3.6정보/국민학교 취학률 32%… 중학생 비율은 0.3%/하루 11시간 노동 직공 월급 쌀 1.2섬값 해당/매년 30∼60명 호랑이·표범·곰등에 물려죽어일제강점시대 한반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당시 한민족은 어떤 생활을 했고 일제에 얼마나 수탈을 당했는가. 광복 50년을 맞아 통계청이 21일 발표한 「광복이전의 경제·사회상」를 통해 당시의 사회모습과 생활상을 살펴본다.

◇인구

▲인구현황:한일합병 당시인 1910년말 한반도 총인구는 1천3백31만3천명으로 남자가 7백5만7천명(53%), 여자가 6백25만6천명(47%)이었다. 이중 한국인은 1천3백12만9천명(98.6%)이었고 일본인은 17만2천명이었다.

43년말 총인구는 2천6백66만2천명으로 2배가량 늘었으며 일본인수도 75만9천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러나 44년 5월1일 실시된 국세조사결과 한국인 인구는 1943년말에 비해 오히려 69만4천명(남자 39만2천명, 여자 30만2천명)이 줄었다. 이는 징용령 징병제 정신대 등으로 많이 끌려갔기 때문이다. 1944년 현재 12세이상 한국인중 약 80%가 문맹이었다. 1942년 평균수명은 44.9세(남자 42.8세, 여자 47.1세)였다.

▲결혼:1935년 10월1일 기준 국세조사에 의하면 암울한 시대상과 조혼풍습을 반영, 15∼19세 여자중 63.3%가 결혼했으며 10∼14세도 4%나 됐다. 1923년을 기준으로 20∼24세 신부가 연하의 신랑과 혼인하는 비율은 27%였다.

▲직업:1930년 당시 한국인의 80%가 농업에 의존했으며 1944년 현재 직업을 가진 15세이상 한국인중 96%가 단순작업 노동자였고 14세이하 어린이의 6%가 생계를 위해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1931년자료에 의하면 생활이 절박했던 영세궁민(영세궁민)수가 총인구의 27%에 달했다.

▲유민:식민시절 만주로 떠난 사람이 1백만명을 넘었으며 생활고등으로 산으로 들어간 화전민수도 1936년 기준 1백52만명이나 됐다. 1940년 당시 한국인의 6.5%가 생활에 쫓겨 고향을 떠나 타도에 거주했으며 특히 함북과 경기로 몰렸다.

◇토지 및 농업

▲토지:1943년 당시 논은 서울 대전 부산, 택지는 평양 함흥 부산등의 순서로 가격이 비쌌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토지는 1911년부터 1943년까지 약30년간 9.4배 증가했다. 1인당 평균 토지보유면적(1942년)은 한국인이 1정보인 반면 일본인은 3.6정보였다.

▲농업:1942년 현재 한국인 농가의 70%이상이 사실상 소작농이하 계층이었고 미곡증산계획으로 쌀 생산은 늘었으나 한국인의 1인당소비량은 1920년 연간 0.625석에서 28년 0.525석으로 오히려 줄었다.

◇광공업

▲광업:1930년대 중반을 전후, 일본인 주도아래 「골드러시」 선풍이 불어 1934∼1939년 2만4천5백여건의 금은광 광업 출원이 있었다. 식민지시대 일본으로 반출된 금은 총생산량의 61.3%인 약2백50만톤이었다.

▲공업:1943년 당시 공장은 1만3천여개, 종사자는 36만3천명이었으며 한국인 공장(1939년)은 60%였으나 94%가 종사자 50명이하의 중소규모였다. 1940년을 기준으로 15세이하 직공이 13%였고 여자직공의 경우는 26%나 됐다. 하루 평균 11시간 노동(43년)에 남자 한달봉급은 쌀 1.2섬값에 불과했다.

◇상업 및 금융

▲상업:1941년 기준 법인회사수는 3천3백54개였고 이중 주식회사가 68%였다.

▲금융:은행수(1943년)는 본점 5개, 지점 및 출장소는 2백41개였고 인구 1인당 은행예금은 96원이었다. 봉급생활자와 소상인들은 전당포를 자주 이용했고 의류를 제일 많이 맡겼다. 사설대금업이 성행했으며 금리는 월 최고 3푼9리에서 최저 1푼5리였다.

◇운수·전매·무역

▲운수:철도 이용객은 1910∼1943년에 63.5배 늘었으며 철도수입(1935년)이 총독부 예산의 31%를 차지했다. 자동차수(1938년)는 8천8백여대로 인구 2천5백70명당 1대꼴이었고 1944년 서울전차는 2백30대가 운행되어 하루평균 53만4천명이 이용했다.

▲전매:1943년 당시 전매수입의 비중은 조세수입의 52% 수준이었고 인구 1명당 담뱃값은 8원20전으로 약 쌀 2말정도였다.

▲무역:식민지시대 수출액의 84%, 수입액의 82%가 일본을 상대로 한 것이었고 주요 수출품은 쌀등 식료품, 수입품은 면직물 등이었다.

◇거시경제

▲경제성장:1911∼1938년중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3.7%였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11년에 쌀 1섬(1백80ℓ)값인 34.5원(원)에서 38년엔 1백30.4원으로 늘었다.

▲산업구조:1911년 산업구조는 1차산업(농림어업) 66.1%, 2차산업(제조업) 4.7%, 3차산업(서비스업)이 29.2%로 전형적인 후진농업사회였지만 38년엔 1차 48.6%, 2차 19.5%, 3차 31.9%로 변화됐다.

◇재정

▲세금부담:1911년 1인당 납세액은 0.9원에 불과했으나 43년엔 24.1원으로 늘어났다. 총독부의 조세수입액도 같은 기간에 1천3백30만원에서 6억4천1백60만원으로 48배나 급증했다.

▲예산:총독부는 태평양전쟁기간에 전비마련을 위해 초팽창예산을 편성, 국공채를 남발함으로써 43년 전체 국가채무는 16억3천6백만원에 달했다.

◇물가·임금

▲임금:대부분 말단직이었던 한국인 공무원의 평균월급은 43년 일본인들의 45∼52%수준에 불과했고 인부일당도 한국인은 1.2∼1.9원인데 비해 일본인노임은 2.1∼3.2원이나 됐다.

▲물가: 1937∼1944년중 서울(경성)의 소매물가는 연평균 10.9%씩 올랐지만 임금상승률은 인플레 수준에도 못미치는 9.3%에 불과, 짐꾼들의 경우 하루일당으론 쌀 2되밖에 살 수 없었다.

◇교육

▲기초교육:교육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고 민족차별이 극심했다. 1940년 국민학교취학률은 32%(일본아동은 99.9%)에 불과했고 전인구중 중학생비율은 한국인이 0.3%, 일본인은 5.2%였다.

▲고등교육:고등학생수는 한국인이 5천6백28명당 1명꼴이었던 반면 일본인은 1백93명당 1명은 고등교육을 받고 있었다. 교원양성기관인 사범학교도 한국인학생수는 3천4백52명당 1명, 일본인은 2백27명당 1명꼴이었다.

◇의료·보건

▲의료환경:1943년 전국의 병원수는 1백81개로 병원 1개가 14만7천명의 인구를 담당하고 있었다. 의사수도 3천8백13명에 불과, 인구 7천명이 의사 한 사람에 매달리고 있었다.

▲질병:각종 전염병의 30%가 10세미만 어린이들에게 발생했고 10세미만 환자 1백명중 22.8명은 결국 사망했다. 장티푸스 이질 천연두등 급성전염병에 한해 평균 2만여명이 감염됐었다.

▲신체:1924년 17세 남학생의 평균신장은 1백55㎝, 체중은 44㎏(현재는 1백71㎝, 63㎏)이었고 여학생은 1백51㎝, 45㎏(현재 1백59㎝, 54㎏)이었다.

◇사회·문화

▲쟁의:1910년대초 노동쟁의발생은 연평균 5∼6건, 참가인원도 6백63명에 불과했지만 수탈이 강화되면서 28∼36년엔 연평균 1백58건, 참가인원은 1만2천명으로 늘었다.

▲문화생활: 1941년 전화는 1천3백57명당 1대꼴로 보급됐었지만 70%가 일본인들이었다. 영화는 1년에 1편 관람했고 연극은 6명당 1편꼴로 관람했다.

▲기타:생활이 어려워지면서 1910년 4백74명에 그쳤던 자살자수가 37년엔 2천8백16명으로 증가했다. 호랑이 표범 곰같은 맹수에 의해 물려죽는 사람도 매년 30∼60명에 달했다.<이상호·이성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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