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대 국회의 마지막 회기를 맞이하여 현재 정치인들과 정파들은 총선과 대권을 향하여 또 다시 요란하게 대결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조용한 다수의 동의를 얻어야만 각자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지난 6·27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앞으로 다가올 선거에서도 조용한 다수가 민심의 소재를 준엄하게 심판할 것이다. 후보자들은 이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한국정치에서 보여준 통상적 관행을 바꾸어야 한다. 과연 그들이 누구이며 진실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실로 겸허한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지역, 인물, 세대별로 다시 분열하고 있는 정치세력들 간에 승리하는 연합을 구성하는 것도 묵묵히 생업에 종사하는 유권자들의 동의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개혁, 변화, 세대교체도 결국 선거를 통하여 순리적으로 이루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된 것이 민주주의가 이 땅에서도 정착하고 있다는 징조이다. 돌이켜볼 때 격동의 1970년대에는 군이 간헐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여 거부집단으로 행사했고 1980년대에는 대학생들이 권위주의체제에 항거하는 시위를 격렬하게 전개했던 것이다. 1987년 이후 비교적 공정한 선거가 실현되자 유권자들의 다수가 민심의 향방을 판가름해 왔으니 한국에서도 정치가 적나라하게 전개되는 세력간의 투쟁만으로 좌우되기보다는 시민들의 합헌적인 투표를 통하여 차분하게 행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정치발전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이 국민동의가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정치에서 승리하려면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제 비정상적인 혁명이나 쿠데타, 항거는 성공할 수 없으므로 모두가 대등하게 장외보다는 장내에서 경쟁해야 한다. 유권자들을 상대로 교육하고 동원하려는 각종 운동과 일회성 구호는 큰 효과를 낼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다수의 요구와 충고를 겸손하게 수용하여 정책과 제도개선에 반영해야 한다. 차기 총선에서도 이처럼 조용한 다수를 대변할 수 있는 후보가 당선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지적하기는 어렵지만 국민의 3분의 2 이상에 해당한다. 그들중 대부분은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지칭하고 있는데, 부자도 아니고 극빈자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사실상 「중간계층」이라 하겠다. 전국의 각 도시에서 거주하고 있는 이들은 정치가 불편을 끼치지 않고 유익하게 작용하기를 원한다. 그들의 직업은 매우 다양하며 소득면에는 서민층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바로 이들이 평소에는 조용하게 지내지만 선거때는 주권행사자로서 민심을 과시해왔다.
구체적으로 민심이 무엇인가는 투표가 끝난 뒤에야 알 수 있다. 평시에는 민심의 방향을 포착하기 위하여 각종 표본조사가 실시되고 있다. 다만 그 방법여하에 따라서 이러한 여론조사는 실수와 오판도 초래하므로 주기적인 여러가지 조사를 더욱 과학적으로 실시하여 비교분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론조사를 하지 않더라도 국민 다수가 무엇을 원하는가는 알 수 있다. 언론이 이것을 보도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국민들은 정치인들이 당면한 공공문제를 해결하는데 실적을 내기를 바라고 있다. 예컨대 더욱 안전한 공공시설, 좀 덜 막히는 교통사정, 안정된 물가와 고용, 개선된 교육기회와 주택조건, 이것들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항시 희망하는 사항들이다. 눈을 밖으로 돌린다면 당장에 극심한 경제난과 수해에 직면한 북한체제에 대한 대비책에도 많은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고 있다. 보다 일관성있고 조율된 방법으로 남북관계와 한미관계를 관리하는 것도 우리가 모두 기대하는 바이다.
여야간에 정책원칙상의 차이가 점차로 희미해지고 있는 이 때 국민들은 안보 경제 정치의 각 쟁점에 대하여 각 정파들이 더욱 선명한 색깔로 대안을 제시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정치가 「가능의 예술」이라면 현재 재연되고 있는 지역감정과 갈등을 초월하여 새로운 통치연합을 구축할 수 있는 지도력을 우리는 고대하고 있다.
조용한 다수의 소망을 경청하여 소수의 야심을 희생할 수 있는 지도력이 요망되고 있다. 외부도전에 성공하기 위하여 내부단결에 앞장서서 실적을 내는 정치가를 조용한 다수는 갈망하고 있다. 그것은 시민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실제로 일정한 업적을 내는 정치이며 명쾌한 이념과 가치에 근거한 정치이다.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는 국민이 원하는대로 올바른 일을 하고 그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제도이다. 실제로 이것을 보장하는 것이 선거이며, 투표결과에서 조용히 있던 다수의 의견이 가시화된다. 정치를 지망하는 사람들은 이 소박한 진리를 재음미해야 할 것이다.<연세대 교수·국제정치학>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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