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하는 우리시대의 묵시론적 풍경화오정희의 근작 「구부러진 길 저쪽」(문학과사회 가을호)은 그녀가 여전히 삶의 어두운 심연과 싸우고 있는 작가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데뷔작 「완구점 여인」 이후 그녀가 일관되게 천착해 온 불길하고 섬뜩한 세계가 이 작품에서도 은밀히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물과 산에 둘러싸인 원천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엔 인자 은영 현우등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있지만 뚜렷하게 주인공이라 할만한 사람이 부각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이런 여러 인물들의 삶의 배후에서 끊임없이 굴착기의 굉음처럼 울려퍼지는 파멸의 예감이라 할 수 있다. 물과 산에 가로막혀 있는 도시처럼 그들 모두는 출구 없는 각자의 삶 속에 갇혀 있으며 조만간 엄청난 재앙 속에 내던져지고야 말 것이라는 암시가 되풀이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 재앙의 일차적 원인은 인간의 폭력성과 인간관계의 단절이다. 현우는 사소한 다툼 끝에 주정뱅이의 머리를 내리쳐 쓰러뜨리고, 평범한 고등학생은 어느날 갑자기 전자오락실부부 살해범으로 돌변한다. 이런 폭력의 배후엔 인간관계의 단절이라는 우리 시대의 보편적 질환이 자리잡고 있다. 인자는 남자에게서 버림받고 딸 은영을 낳았으며 현우는 친부모는 물론 양부모에게까지 버림받고 고아로 자라났다. 버리고 버림받는 이 관계는 남자에게 버림받은 한 여인이 기차에서 자기 자식을 다시 유기하는 삽화에서 드러나듯이 끝없이 악순환을 거듭하며 불행을 재생산한다. 사람들은 「회전목마처럼 도시 멈출 수도 벗어날 수도 없이 결국 같은 곳을 맴돌게 하는 정체불명의 이 도시」에서 「생의 공포에 노출된채」 무의미한 삶을 살아간다.
작가는 이처럼 우리 시대의 묵시론적 풍경화를 그려 나가면서 이런 세계에선 결국 희생제의가 반복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소설 첫머리에 나오는 둥근 양배추와 소설말미의 염색약을 피처럼 뒤집어 쓴 인자의 머리가 겹쳐짐으로써 강한 정서적 울림을 불러 일으킨다. 인자의 머리 또한 양배추처럼 우리 시대의 야만성 때문에 무엇엔가 희생당해 「제물로 바쳐질」 것이라는 예고인 셈이다. 우리 모두는 반복되는 희생제의의 집행자가 되어 뜻하지 않은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고 반대로 폭력의 제물이 되어 아무 의미도 없는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삶 속에 잠복해 있는 「바닥모를 심연」을 응시하는 작가의 어조는 낮고 처연하다. 그러나 그 낮고 처연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가 감지하게 되는 것은 한 시대의 총체적 몰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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