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 와서 가족끼리 혹은 친구나 연인끼리 피서가는 것을 보고 참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이 느낌은 이내 가슴 저미는 아픔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북한에 두고온 부모 처자와 형제들 생각 때문이다. 북한주민들은 여행은 커녕 멀리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 생일에도 갈 수가 없다.
어디를 가든 여행 증명서가 있어야 하는데 부모사망이나 환갑 본인 결혼식 외에는 여행증명서가 발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의 식량사정이 가장 어려운 5월과 6월에는 아예 여행증명서가 무용지물이 된다. 이 시기에 함남·북 양강 자강도 지방에서는 몇달씩 배급을 주지않아 주민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황해도지방으로 몰린다.
당장 식구들을 먹여 살리려고 열차에 몸을 싣는 이들에게 여행증명서 따위는 안중에 없다. 안전원들도 단속할 엄두를 못 낸다.
여행증 없이 기차에 오른 주민들이 한둘도 아니어서 열차칸마다 콩나물 시루가 된다.
『왜 증명서 없이 기차를 탔느냐』고 단속했다가는 『그럼 앉아서 굶어 죽으란 말이냐』는 거센 항의를 받는다. 주민들은 동해에서 잡히는 어류나 중국 보따리 장사꾼들에게서 산 물품들을 황해도로 가져가 강냉이로 바꾸어 연명한다.
93년 6월 23일 해주에서 혜산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출장갈 때의 일이다. 새벽 1시에 기차를 타려는데 열차 승강대마다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붐볐다. 워낙 사람이 많은데다 승강대마다 강냉이 마대가 쌓였기 때문이다.
여기 저기서 차창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창으로 기어올랐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해서야 겨우 한 승강대에 간신히 매달릴 수 있었다. 그런데 머리위에서 귀청을 찢는듯한 악에 바친 소리가 들렸다.
『여긴 못 올라옴매, 콱 차버리기 전에 어서 내립새』 함남도 특유의 사투리였다.
나는 강냉이 마대위에 서있는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열차가 떠나는데 어떻게 내린다고 그러오』 『그럼 다음 역전에 가서 내립세』 『어쨌든 좀 올라가기요, 사람이 살고 봐야잖소』
나는 무작정 사람들 틈새로 비집고 들어갔다. 사방에서 아우성이 터졌다. 발 하나를 편히 놓을 틈도 없는 북새통 속에서 아침까지 서서 갔다.
새벽 7시께 원산에 도착하니 날이 밝았다. 열차에서는 또 다른 웃지 못할 광경이 벌어졌다. 북새통에 아무도 밤새 용변을 보지 못한 것이다. 화장실 안에 강냉이 마대가 꽉 들어찼고 그위에 사람들이 미어 터졌다.
용변을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객차와 객차 사이의 이음새 뿐이었다.열차가 심하게 덜컹거리고 커브를 돌 때면 공간이 좁아져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지만 급한 사람들은 그 곳이라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처녀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거리낌 없이 말했다. 『아저씨들 양해해 주세요』 그 처녀는 치마를 걷고 두다리를 가까스로 벌린채 열차 이음새에 앉아 일을 보았다.
『사람이 사는 꼴이 이게 아닌데…』 누군가 한숨 섞인 탄식을 했지만 소리는 이내 소란속에 묻히고 말았다.
□김대호씨 약력
▲59년 함경남도 단천 출생
▲북한 핵물리대학 통신과정 수료
▲남포지구 수산 외화벌이 채취대 대장
▲조선 제6설비(원자력공업부 소속) 수출입회사 남천무역 지사장
▲94년5월 제3국통해 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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