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청산과 재창조의 조화/민중의 영원한 우상 「에바 페론」 향수부활속/보수화 현메넴정부 경제개발에도 높은지지『과거가 없어도 현재는 가능한가』 『과거란 무엇이며 전통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저 고루하고 낡은 것인가』―나는 이번 여행에서 이런 질문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과거 청산 못지않게 전통의 재창조도 중요한 과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이같은 결론에 대한 의미있는 착상을 얻었다. 아르헨티나의 현대정치사를 꿰뚫어 온 페론주의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변화는 크게 두 측면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페론당의 정치적 변신으로 특징되는 메넴주의의 등장이고 다른 하나는 페론 전대통령의 부인으로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에비타 페론의 문화적 부활이다.에비타 붐은 토머스 마르티네츠가 지난 6월에 출간한 「성녀 에비타(SANTA EVITA)」라는 소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출간된지 2개월만에 6판이 나왔고 3만8천부가 팔린 이 책은 1952년 33세 나이로 숨진 에비타의 시신을 둘러싼 정치의 이면사를 흥미롭게 전하고 있다.
○에비타시신 곡절끝 귀환
에비타가 죽은 뒤 페론은 시신을 특수처리하여 미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55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군부는 에비타가 살던 집을 부수고 그 자리에 국립도서관을 지었다. 그러나 국민들이 에비타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에비타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몰랐다. 그들은 결국 비밀 작전을 전개, 시신을 이탈리아의 모처에 숨겼다고 한다. 이 시신은 73년 우여곡절 끝에 페론이 귀국하면서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다.
에비타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국민학교 교육밖에 못받은 하층계급 출신이다. 따라서 고상한 말을 몰랐고 생활이 어려웠을 때는 창녀 생활도 했으며 인공 유산을 거듭, 불임증에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청순하고 어여쁜 에비타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조그만 라디오 방송국의 연극배우로 일할 때였다. 마침 아르헨티나에 큰 지진이 발생, 피해자를 돕기 위한 기금 모금 파티장에서 에비타는 그녀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준 후안 페론을 만났다.
당시 페론은 노동장관으로서 노동자를 정치적으로 포용하는데 적극적이었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지지가 높았고 에비타도 관심을 가졌다. 45년 10월 페론은 정치적 이유로 구속됐다. 그러자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민중시위가 일어났으며 이때 에비타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에게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이것이 큰 효과를 거둬 페론은 풀려났고 다음해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됐으며 둘은 곧 결혼했다. 페론은 재혼이었고 전처는 사별한 상태였다.
에비타는 곧 서민대중의 우상으로 추앙을 받게 됐다. 상상하기 힘든 수직 신분상승이 실현된 셈이었다. 하지만 에비타는 정상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자신의 근본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녀는 에바 페론 재단을 창설해 농촌의 어려운 여성을 지원하는등 가난한 사람을 돕는데 앞장섰다. 그 일관성이 에비타의 성가를 한층 높였다.
○죽을때까지 서민편에 서
51년 에비타는 부통령 후보로 나설 것을 종용 받았다. 에비타는 이미 이때 병든 상태였다. 그해 8월 에비타는 『부통령 후보는 사양하지만 투쟁은 결코 멈추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서민의 편에 서서 당의 관료나 자본가들과 결연히 싸우는 모습을 죽을 때까지 보여줬다.
에비타 붐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70년대초 좌파와 우파가 페론당 안에서 격돌할 때 에비타는 좌파 진영의 상징적 존재였다. 쿠데타로 실각됐던 페론은 73년 권력을 다시 잡았지만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74년 그가 죽자 권력을 이어받은 세번째 부인 이자벨은 그 혼란에 더욱 기름을 붓다가 쿠데타로 쫓겨났다. 민중과 함께 싸우다가 청순한 이미지를 남긴채 죽은 에비타와 너무 대조를 이루는 종말이었다.
에비타에 대한 평가는 물론 다양하다. 라플라타에서 만난 어느 대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에비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지만 공짜 보너스를 준 것이지요. 산업을 일으키고 기반 설비를 확충하는 것같은 어려운 일은 하지 않으면서 노동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결국 자원을 낭비했습니다』 그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그러나 그는 에비타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렇듯 에비타의 이미지는 페론주의와는 무관하게 새롭게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에비타 붐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같은 전통의 재인식과 또 다른 현상인 메넴주의의 정치적 바람이 서로 어떻게 연관될 것인가 생각해 보았으나 결론은 아직 얻지 못했다. 어느 면에서 모순되는 것같기도 하다. 에비타 바람은 강한 민중성 순수성 전위성등을 상징하지만 메넴주의는 보수성 우경화 엘리트주의등을 뜻하기 때문이다.
페론당은 원래 운동정당으로 출발했다. 노동자의 참여와 복지를 중시했다. 때문에 좌파적인 성격이 강했다. 현대통령 메넴은 89년 선거에서 전통적인 페론당의 정책을 내걸어 선거에 승리했으나 취임후에는 곧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그는 만성적인 재정적자 해결과 생산혁명을 위해 대대적인 공무원 감축 정부기구축소 지방정부지원중단 국영기업민영화 세제개선 노동자임금동결등의 내핍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개방을 통한 산업경쟁력 강화 정책도 추진했다. 이는 한마디로 페론당의 현저한 우경화를 뜻한다.
메넴정책의 정치경제적 결과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린다. 물가안정, 국제수지의 개선, 재정적자 감소, 생산증가등은 좋은 점이지만 실업률 증가, 중산층의 몰락, 교육 및 복지여건 악화, 분배왜곡 심화, 고정환율제(1달러=1페소)에 따른 해외자본유치의 어려움등이 부작용으로 꼽히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실업률은 현재 18%에 이르고 있다.
○“일을 해야 잘 산다” 입증
그러나 정치문화적 측면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메넴은 신보수주의 경제정책을 전면 수용하면서 전통적 세력기반인 노동자의 지지를 잃은 대신 자본가와 해외국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메넴은 누구나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잘 살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줌으로써 거대한 의식혁명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아르헨티나에는 특유의 지대 경제 때문에 일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뿌리깊게 박혀 있다. 세금을 내는 사람은 극소수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라 기강이 잡히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메넴정부는 더 이상 과거의 페론당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메넴주의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페론당에 투표하는 25% 정도의 고정표가 있다. 94년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에 재선된 메넴을 비판하는 지식인조차 메넴이 아르헨티나 4백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데는 동의했다.
에비타와 메넴. 이들은 분명 잘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상징이다. 민중과 보수, 문화와 돈, 좌파와 우파, 순수와 타협등 서로 어긋나는 이미지를 준다. 그럼에도 이들은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페론주의 전통의 두 얼굴임에 틀림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이자 차기 대통령 감으로 물망에 오르고 있는 48세의 에드와르도 듀할데는 페론과 에비타에 관한 멋진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메넴보다 페론주의 전통에 더 가까운 인물이다.<글=한상진 교수>글=한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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