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에 다리아래서 만나기로 한/아가씨 기다리던 젊은이 익사/그 「정직과 믿음」전설 해마다 떠올라처서가 지나면 그토록 사납게 물어 뜯던 모기 입도 비뚤어진다고 했던가. 아침 저녁으로 제법 소슬한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다 했더니 벌써 팔월 한가위이다. 해마다 추석이 되면 나는 어렸을 때 들은 내 고향 나무다리에 얽힌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떠올리곤 한다.
그 전설의 내용은 내가 성년이 되어서 중국의 전설과 비슷하다는 걸 알았지만 어느 쪽이 먼저 생겨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풍수사상 때문이었을까. 우리 선조들이 모여서 생활한 취락구조를 보면 모두 비슷한 공통점이 있다.
기품이 있는 높은 산줄기가 뒤에 버티고 있으면 그 앞에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작은 산이 있다. 그 밑은 삼태기처럼 벌어져서 평지가 이어진다. 그런 곳에는 꼭 집들이 들어서 있고 동네가 있다.
옹기종기 초가들이 모여 있고 동네 앞에는 타작마당이 있고 동구 밖에는 나그네들이 쉬어가는 느티나무와 팽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뿐이 아니고 동네 앞에는 어김없이 맑은 시냇물이 띠를 두른채 흐르고 있고 복판에는 나무기둥을 박고 흙으로 다져 만든 나무다리가 걸려 있다.
물론 난간이 없다. 그래서 뺑덕어미를 만나 뺑뺑이를 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심봉사도 그 다리에서 떨어져 물에 빠졌다. 이것이 대개의 우리 고향마을의 풍경이다. 추석이 지나면 가을걷이도 끝나고 그래서 고모는 시집을 가기로 되어 혼수로 가져갈 수를 놓기 위해 호롱불 심지를 돋워놓고 첫 새벽을 맞곤 했다.
고모 무릎에 누워 잠도 자지 않고 옛날얘기를 해달라고 조르면 달걀귀신 얘기부터 아는 얘기는 다 들려 주었다.
『옛날 우리 동네에 김신이라는 젊은이가 살고 있었단다. 가난하기는 했지만 글도 했고 농사일도 열심히 해서 칭찬이 자자했는데 그 젊은이는 서당집 아가씨를 좋아하여 서로 눈이 맞았더란다. 하지만 좁은 동네라 소문이 날까봐 사랑을 나누려고 만나고 싶어도 자유롭게 만날 수 없는 거야. 만나고 싶은데 못 만나면 얼마나 미칠 일이니? 그러다 마침내 그 젊은이는 우물터에서 물을 길어오던 그 아가씨를 기다렸다가 어렵게 약속을 하게 됐더란다』
『무슨 약속인데』
『만날 약속. 마침 내일이면 한가위날이었지. 추석날 저녁이면 어른들도 동네여자들이 모여서 놀거나 마실을 가도 너그럽게 보아주는 게 관습이지. 그래서 추석날 밤에 시냇가 나무다리 밑에서 보름달이 떠오를 때 만나기로 했단다. 지금이야 시계가 흔해서 어느 집이든지 하나씩은 다 있지만 그 시절에야 시계가 어디 있니? 그래서 달이 뜰 때 만나기로 했던 거야』
『그래서 만났어?』
『만났으면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아니지. 만나지 못했단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그 젊은이와 아가씨는 가슴을 졸이며 만날 시간을 기다렸지. 젊은이가 먼저 다리 밑으로 가서 아가씨 오기를 기다렸단다. 다리 밑에 서 있자니까 달도 뜨기 전부터 발목에 물이 차기 시작하는거야. 강물은 바다가 만조가 되니까 밤이면 불어나게 되어 있단다. 동산 위에 한가위 달이 뜨려고 황금색으로 물들기 시작했지. 물은 불어나 벌써 무릎을 적시고 있었어. 이윽고 동산 위에 둥글고 아름다운 보름달이 둥실 떠 올랐지. 한가위 밤이라 타작마당은 동네사람들이 노느라 시끌벅적했지. 아가씨는 그때쯤 왔어야 했어. 약속한 시간이니까. 그런데도 오지 않는 것이었어. 점점 시간이 흘렀지. 그럴수록 물이 불어나 이제는 가슴까지 차 오르는 거야. 그래도 오지 않았어. 하지만 젊은이는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아가씨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단다』
『멍청이다. 다리 위에서 기다리면 되잖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리 위에 서 있으면 동네사람들에게 들킬 염려도 있고 애초 약속하기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꼼짝을 안한 거야. 물은 점점 더 차올라서 목까지 잠겼지만 아가씨는 오지 않았어. 그러다 그만 선채로 물에 빠져 죽었더란다. 피치 못할 어른 심부름 때문에 늦게 아가씨가 달려갔지만 이미 흔적도 없었더란다』
올 추석에는 그 얘기를 들려 줄 고모를 뵐 수 없다. 노환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 다리도 지금은 콘크리트다리로 변해 있다. 하지만 난 정직과 믿음이 있는 그 다리를 보기 위해 고향으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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