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던 폭우가 멎고 나서였다. 오랜만에 햇볕을 본 김에 내리 이틀을, 하루는 시내나들이를, 하루는 교회를 다녀왔는데 두번 다 쓰레기 때문에 우울했었다.한번은 한옥을 개조한 음식점이 즐비한 인사동 뒷골목이었는데 집집마다 문전과 담밑을 쓰레기로 성을 쌓고 있었다. 물론 다 규격봉투였고 꼭꼭 마무리를 잘 지었는데도 악취가 진동을 하고 파리는 살판 난 듯이 잉잉대고 있었다. 코를 쥐고 그 앞을 지나면서 우울했다기보다는 섬뜩했다는 표현이 더 맞는데 그 동네만의 사정이라면 아마 그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음식점 골목이니까 쓰레기의 적체가 더 적나라했을 뿐 그 무렵 우리 아파트단지도 마찬가지였다. 제때 제때 수거해갈 때는 사용하지 않던 콘테이너 쓰레기통을 다시 사용해야 할 만큼 쓰레기가 밀려서 썩어가고 있었다. 폭우 피해복구와 함께 곧 수거가 원활해졌지만 원활해져 봤댔자 그 쓰레기가 어디로 갔겠는가. 우리가 유구한 세월 몸붙이고 사는 이 아담하고 아름다운 강산의 가슴밖에 더 있겠는가. 가슴에 묻혀 썩어간다면 오죽이나 좋을까만은 쓰레기 부피의 대부분은 안 썩는 것들이다. 안 썩고 도처에 숨어서 국토의 숨구멍과 혈관을 막고 스스로 암이 되어 생명을 죽이는 것들이다.
우리는 일인들이 우리의 혈을 막으려고 박았다는 쇠말뚝보다 우리 스스로 국토를 죽이고 있는 썩지 않는 쓰레기를 더 두려워하고, 그 못할 짓에 대해 자책해야 한다. 쇠도 썩게 되어 있고 우리의 기만 바르다면 그까짓 저주하는 악기쯤 무시해줄 수도 있다.
쓰레기 종량제가 처음 실시됐을 때만 해도 그런대로 괜찮은 해결방안처럼 보였다. 쓰레기를 승용차 트렁크에 싣고 교외에 몰래 갖다 버리는 얌체족까지 있다는 소식을 들어도 자가용족까지도 규격봉투값을 그렇게 아까워한다면 이 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될 수 있을 것같았다. 그뿐 아니라 생산자나 상인들까지 포장에 신경을 쓰는 듯 했고 소비자가 과대포장을 거부하는 사례가 종종 보도됐다.
그러나 웬걸. 우리가 누군가? 명절연휴만 돼도 해외나들이가 생활화한 씀씀이 호탕한 국민이 아닌가. 과대포장을 기피하고 장바구니까지 등장한 시기는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고, 써보니 규격봉투값 아무 것도 아니더라는 쪽으로 정착을 하고 말았다. 결국 규격봉투 안에 비닐봉투가 겹겹으로 들어앉아 썩지 않는 쓰레기만 더 늘어났다. 쓰레기 버리는데 드는 비용을 아끼려고 양을 줄일 수 있으리라는 발상은 안이했다.
더 늦기전에, 우리 땅에서 나는 게 우리 몸에 좋다는 신토불이에서 우리 땅과 우리 몸은 공동운명체라는 신토불이로 각자의 사고를 전환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은 스스로 의식하든 안하든간에, 무얼 먹거나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우선 자기 몸과 의논하게 돼있다. 아무리 입에서 맛있어도 배부르면 못먹는 것 자체도 몸과 의논한 결과이다. 가장 자기 몸을 아끼는 사람은 과식을 안하고 과로를 삼가는 사람이다. 소비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먼저 우리가 취한 나머지를 소화시켜 줄 자연과 의논하는 걸 생활화해야 한다. 「한가위에는 가난한 집 며느리 배덧이 난다」는 속담이 있는데 추석선물이 쏟아낼 엄청난 쓰레기를 생각한다면 「한가위엔 좁은 국토 몸살난다」로 고쳐야 하리라.
또 한번의 나들이는 성묘였다. 추석도 되고 폭우끝도 궁금해서 앞당긴 성묘였는데 역시 사태가 난 곳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그 사태난 단면에 드러난 스티로폴의 백색이 묘지라 그런지 백골을 연상시켜 기분이 언짢았다. 조화에서 생긴 쓰레기일 터였다. 성묘 아니라도 친지의 장례에 묘지까지 따라가는 경우 새로 생긴 묘지는 조화로 뒤덮고도 남아 그 주위까지 어지럽게 나동그라져 있는 걸 보게 됐다. 꽃은 썩지만 비닐바구니나 꽃을 지탱해준 스티로폴은 남게 된다. 치우는 수고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것 좀 안하는 수는 없을까. 조화를 수로 제한하는 눈가리기식 방안도 꽃농가의 반발을 산 일이 있으니, 농가도 살고 사자에게 꽃을 바치는 아름다운 예절도 유지시키는 새로운 방법으로 조문객들이 부의금과 함께 꽃 한 송이씩, 형편에 따라서는 한 아름씩 들고가 바치고 분향하는 방법도 생각해봄직 하지 않는가. 한 아름의 꽃에 제 이름을 달 것은 또 뭐 있으며, 그런 무명의 꽃이 영전에 산더미처럼 쌓인들 어떠랴. 나중에 그 꽃은 관을 덮고 같이 묻혀도 무방하리라.
3단, 4단으로 천장에 닿게 높이고 기업체나 관직의 이름이 줄줄이 달린 조화가 자기 선전용이지 어떻게 애도의 뜻이란 말인가. 죽음처럼 절대로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일회적이고 엄혹한 사건 하나만이라도 그따위 허구의 애도로부터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작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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