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싸움을 위한 성찰최승자는 우리 시대의 시에서 크건 작건 하나의 단계를 나타낸다. 무엇보다도 그의 난폭한 시어는 지성과 폭력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세웠다. 그의 앞뒤에는 그보다 훨씬 더 난폭한 시를 쓰는 시인들이 많았지만, 그들에게서 지성은 그 언어를 조직하고 검열하는 장치일 뿐이었다. 그래서 시는 결국 음험한 비유와 풍자에 이르렀으며, 그 지성마저 없을 때는 험담에 그쳤다. 최승자의 시어는 풍자하는 말이 아니다. 항상 직관에 의지하는 그의 지성과 피섞인 가래침이고 육체의 파편들인 난폭한 언어들은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조직하고 검열하기는커녕 서로가 서로를 쏘아붙이는 활과 화살이었다. 그에게서 폭력이자 지성인 이 시어들은 해석하고 비평할 틈도 없이 누구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으며, 사불여의하면 시인 자신의 가슴에 들어와 꽂혔다. 언어는 무엇을 지시하기 전에 사나운 물질 그것이었다.
상당기간을 침묵했고, 또 그 힘을 잃은 듯이 보였던 최승자가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우라누스를 위하여」를 비롯한 세 편의 시를 발표했다. 적어도 외양으로는 그 사나움이 없어졌다. 그것들은 각기 천체와의 교통을 말하거나, 우주적 파장과 조율하는 여성·대지의 신생을 꿈꾸거나, 영원한 무의 시간 속으로 육체와 그 고통이 소멸하는 풍경을 응시한다. 「우라누스」에서, 「언뜻 언뜻 하늘빛이 비쳐」 드는 노래를 부르는 시인은 여전히 「이슬 묻은 맨발」이지만, 이 맨발은 젊은 날의 어느 시에서처럼 「청파동에서 수유리까지 손가락질하며 희죽거리며 걸어가고」 싶어할 때의 그 맨발이 아니다. 두 번째 시 「시간은」에서도, 그 신생의 터전으로서 「세상의 진흙 꿈들」이 결코 무시되지 않지만, 이 역시 젊은 날의 어느 시에서 「유물론은 나의 슬픔, 유물론은 나의 오기」라고 짧게 말할 때의 그 감정적 예각과는 거리를 둔다.
그렇다고 최승자를 두고 순응을 말할 수는 없다. 그는 화평하지 않다. 「어느 입술이」 그에게 밤새워 「천체의 서」를 읽어주어도 그는 그것을 받아 적지 않고 「지금 어떤 문법을 고르고 있다」. 문제는 하늘의 예지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인 것이다. 마지막 시 「둥그런 거미줄」은 한 여자가 「소실점 바깥으로 사라」지고, 끝내 그 「소실점이 지워진다」고 말하지만, 그 소실점이 곧 고통의 중심인 것을 아는 이 여자는『너희들 정말 이렇게 지워지도록 내버려 둘꺼야』라고 묻고『그럼 지워지지 않겠어』라고 쏘아대며 금방이라도 돌아설 채비를 갖추고 있다.
시인 자신의 말마따나 늙은 권투선수가 링에 오르지 않는다고 그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권투선수도 될 수 있었던 시인이 되지 못할 것은 무엇인가. 그가 그것을 모르겠는가. 그는 이 말로써, 또는 이들 시로써, 자신이 그 세대적·시대적 조건을 넘어서서 이제 인간적 조건 앞에 서 있음을 환기시킬 뿐이리라. 그것들은 침묵의 연장이다. 인간조건, 언어의 조건과의 장기전·전면전은 항상 어떤 침묵 끝에 시작되었다.<고려대 교수>고려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