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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반대” 미 풀브라이트전기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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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반대” 미 풀브라이트전기 출간

입력
1995.09.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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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상원의원 활동 진보적 외교 정평/집필 아칸소대교수 「냉전수정론자」 평가/우리에겐 장학재단 설립자로 더 알려져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앞장서 반대했던 비둘기파의 거두이자 30여년간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던 제임스 윌리엄 풀브라이트(1905∼1995)의 전기(FULBRIGHT: A BIOGRAPHY·케임브리지대간)가 출간됐다. 아칸소대 역사학교수 렌달 우드가 쓴 전기는 주로 상원외교위원장 재직시절을 다루면서 그를 냉전수정론자, 신고립주의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미국의 진보적 외교정책의 기수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풀브라이트는 미주리주 섬너에서 출생, 아칸소대를 거쳐 영국 옥스퍼드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귀국후 모교에서 법학교수, 총장을 거쳐 1942년 아칸소주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그는 30여년간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59∼74년 15년동안이나 상원외교위원장을 맡았다.

처음 상원의원이 됐을 때 화가 난 해리 트루먼대통령으로부터 「옥스퍼드출신 망나니」라고 불릴 만큼 그는 외교정책문제로 트루먼, 존슨등 대통령들과 자주 충돌했다. 64년 민주당전당대회에서는 존슨을 지지하는 추천연설을 했지만 1년도 못 가 통킹만 결의안을 둘러싸고 마찰을 빚어 백악관으로부터 한동안 외면당했다. 50년대초 마녀사냥식 공산주의자 색출작업을 벌였던 매카시 상원의원과 치열한 설전을 벌였으며 케네디대통령의 피그만 침공에 유일하게 반대하는등 60년대의 두 가지 큰 이슈―민권 운동과 베트남전―의 반대편 정점에 서 있었다.

케네디행정부 출범초에는 국무장관설이 있었으나 남부출신으로 민권법안에 반대한데다 친아랍적인 태도 때문에 미국흑인지위향상협회 및 유대계 정치인들의 반발에 부딪쳐 무산됐다. 풀브라이트는 자신의 월남철수 주장이 국가정책으로 현실화하는 승리는 거두었으나 74년당시 아칸소주지사였던 데일 범퍼스에게 상원의원 자리를 빼앗기고 정계를 은퇴, 아랍국가들을 대변하는 로비이스트로 활동했다. 60년대 조지타운대 시절 풀브라이트의 보좌관을 지내면서 정치에 뜻을 두게 됐다는 빌 클린턴 미대통령은 지난 2월9일 풀브라이트가 사망하자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내가 없었을 것』이라고 애도했다.

풀브라이트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영향력이나 공로보다 46년에 설립한 장학재단 때문에 우리에게 더 친숙하다. 풀브라이트재단의 장학금을 받고 유학한 전세계의 지식인은 1백20여개국 10만여명이나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순 서울시장, 이현재 전국무총리, 한승수 대통령비서실장등이 이 장학금으로 미국유학을 했었다.<여동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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