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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특별시민」/김길송(서울에서 본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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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특별시민」/김길송(서울에서 본 평양)

입력
1995.09.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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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나는 서울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을 때가 많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한의 전방초소에서 총부리를 남한쪽에 겨누고 당이 명령만 내리면 제주도까지라도 달려가 통일을 성취하겠다고 외쳐댔기 때문이다.

서울에 온지 1년 하고도 7개월이 지나갔다. 그동안 나는 서울생활에 익숙해 지려고 무진 애를 썼다. 서울말씨를 익히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 끝에 지금은 누구와 대화해도 귀순용사라는 것이 금방 드러나지 않게 됐다.

나는 원래 평양시 동대원구역에서 출생했다. 북한사람들의 소원이 평양에서 사는 것이니 만큼 나는 선택받은 사람임에 분명했다. 북한의 시골사람들은 평양을 구경만 해도 출세했다고 생각한다.

평양사람들은 가끔 성분조사를 거쳐 지방으로 내몰린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평양에서 내몰리고 있지만 60년대 중반에도 그랬다.

북한사람들이 평양을 선호하는 것은 평양에 특권이 많기 때문이다. 배급과 주거환경이 우선 다르다. 지방에서는 곡물이 없어 몇달씩 배급을 미루지만 평양시민들은 제때에 배급을 받는다.

지방배급은 잡곡이 90%이지만 평양배급은 입쌀이 60∼90%이다. 간장 된장 기름 및 부식물등도 지방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평양사람과 지방사람은 얼굴색만 봐도 금방 차이가 난다.

나는 남한에 와서 많은 지방을 여행했다. 대화를 해보기 전에는 서울사람과 지방사람이 구분이 잘 안됐다. 그리고 붉은줄이 두줄 그어진 여행증명서를 가져야 평양에 들어갈 수 있는 북한과 달리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92년에 돈을 벌러 러시아 벌목장에 갈 때까지 평양 중앙당 재정경리부산하 돌격대에서 근무했다. 주로 고급주택을 건설하는 게 주임무였다. 특히 김정일이 특별히 선물하는 주택을 지었다.

이때 나는 이렇게 으리으리한 집에서 사는 사람도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50평쯤 되는 집에 가구와 주방기구를 모두 외제로 갖춰놓고 몸만 들어가면 살 수 있는 집이 바로 김정일이 당간부에게 선물하는 집이다.

평양시에는 간부등급에 따라 주거지가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다. 강 북쪽은 고위급, 남쪽은 일반간부와 서민들이 산다.

87년에는 평양시 아파트 건설을 위해 건장한 군 제대자들로 건설사업소를 만들어 평양에 거주시킨 적이 있다. 이 때 지방의 처녀들은 이들과 결혼하기 위해 난리법석을 피웠다. 이들과 결혼하면 꿈에도 그리던 평양시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대군인 건설자들은 30평 남짓한 아파트에 세가구씩 살았다. 부엌이 따로 없어 복도와 화장실을 부엌으로 함께 사용했다. 고위 당간부들의 50평 단독아파트와는 비교가 안됐다. 그런데 지방처녀들은 이런 집이라도 좋다고 시집오려고 안달이었다.

평양에 처음 가본 사람들은 질서있고 깨끗한 시가지가 인상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평양이 가진 이면도 보아야 한다. 거기는 겉과 너무 다르다.

□김길송씨 약력

▲62년 평양시 동대원구역 출생

▲신의주시 동하고등학교 졸업

▲평양중앙당 재정경리부 돌격대 근무

▲러시아 원종임업대표부 벌목 노동자

▲93년 12월 귀순

▲솔표·조선무약 근무

▲숭실대학교 경영학과 3년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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