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정쩡 정부대응엔 비판 미흡/중앙은 개혁방향 제시도 부족중앙은행인 한국은행에서 불법으로 지폐를 유출한 사건이 국민들에게 또한번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사건은 통화의 무정부사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사건이 터지자 한국일보는 중앙은행 공신력상실의 문제점을 연일 크게 보도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마련을 강력히 촉구했다. 특히 중앙은행에서 있을 수 없는 범죄라는 사실을 중시해 관련자들의 문책만이 능사가 아님을 강조했다. 언론으로서 적절한 문제파악과 대응이다.
정부는 문제의 본질을 피하고 적당한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하고 있는 분위기이다. 심지어 이번 사건을 기화로 정부는 재정경제원의 업무감사권을 부활하는등 한국은행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의도까지 보이고 있다. 과거 대형사건을 처리하던 태도로 미루어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정부처리에 대해 언론의 비판이 없다. 언론은 한국은행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과 방향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사건을 용두사미로 만들고 있다.
이번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중앙은행이 어떻게 무기력하고 부도덕한 조직으로 변했는가에 대한 원인분석이다. 그리고 중앙은행의 기능상실이 얼마나 국민경제에 큰 피해를 주는가를 밝혀야 했다. 다음으로 이번 사건을 새로운 중앙은행제도를 만드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결국 한국은행사건에 대한 언론보도는 문제의 심각성만 제기됐을뿐 전문적 분석과 개혁방향제시가 미흡해 정작 사건의 교훈은 살리지 못했다.
중앙은행은 발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치권력의 지배를 벗어나기 어렵다. 62년 군사정부에 의해 정부의 하부기관으로 전락한 한국은행은 물가안정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고 정치논리에 따라 돈을 찍어내는 인쇄기관 구실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20%에 달하는 물가상승등 여러가지 부작용과 후유증을 가져왔다. 국민의 재산이 권력형비리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낳았다. 한국은행사건은 독립성 상실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한국은행은 정치권력의 지배하에 관치금융과 권력형 비리의 사슬에 묶여 있다.
그리고 무기력과 도덕불감증에 빠져 이번과 같은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한국은행의 독립정도가 71개 조사대상국중 64위에 머물렀다는 세계은행의 보고가 문제의 심각성을 입증해주고 있다. 현재 대책으로 논의중인 한국은행 내부조직개편은 지엽적인 사안이다. 한국은행법을 개정하여 한국은행을 국민의 은행으로 만드는 기본적 개혁조치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한국은행의 자율성을 보장하여 모든 일을 스스로 책임지는 선진화한 중앙은행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야 한다.
지난 30년간 발권력이 권력의 통치수단으로 이용되면서 중앙은행독립에 대한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금년초에는 중앙은행독립을 위한 경제학자 1천54명의 서명도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돈줄을 놓을 수 없다는 권력의 힘논리에 밀려 번번히 실패했다. 민주정부의 최소한의 책임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제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상 국민재산보호 차원에서 중앙은행을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런 견지에서 한국일보를 비롯한 언론은 중앙은행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개혁방향을 제시하는데 근본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려대 교수·경영학>고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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