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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에 부는 한국바람(지구촌시대의 문화변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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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에 부는 한국바람(지구촌시대의 문화변동:2)

입력
1995.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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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도시 코르도바 개혁정신 “감회”/382년 전통 현지대학중심 민주화노력에 주민 긍지/우리의 학생운동·통일전망등에 깊은 관심 인상적뉴욕을 거쳐 나의 두번째 행선지는 아르헨티나이다. 93년 여름 나는 중남미를 여행하던 중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잠시 들른 적이 있다. 그 때는 과거 청산문제에 관심이 많아 이를 주도했던 인사들을 만나느라 동분서주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르헨티나에서만 2주를 머물게 되었다. 더욱이나 유명한 코르도바를 갈 수 있게 되어 마음이 더욱 설다. 코르도바는 아르헨티나의 광주 같은 곳이다. 자동차 농식품업 등이 발전한 산업도시로서 전통적으로 야당이 강하고 노동자와 학생운동이 강한 곳이다. 66년 들어섰던 군사정권은 69년의 코르도바 항쟁으로 73년 무너졌다. 76년 군부는 「더러운 전쟁」을 시작하면서 코르도바를 쑥밭으로 만들었지만 코르도바는 83년 군정이 종식될 때까지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다.

○「실종자 사진시위」 눈길

마침 이곳에 온지 며칠 후인 지난 8월 17일은 남미 대륙을 해방시킨 산 마르틴 장군(1778∼1850) 서거 기념일이었다. 그의 동상 주위에는 아침부터 작은 꽃무늬 엽서들과 함께 여러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 군부치하의 실종자 사진이었다. 하오 5시 기념식이 끝나자 가족들은 사진을 들고 동상을 돌기 시작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주(주)의 수도인 라 플라타의 모레노 광장에는 보도 블록위에 다음과 같은 호소가 씌어 있었다. 『실종자들은 부디 살아서 돌아오라. 양민 학살자는 감옥으로 가라. 실종자 자녀들을 원적 복귀하라. 우리 잊지 말자. 사면은 안된다. 석방하지 말라』

나는 알폰신 정부 시절 코르도바 지역 「실종자 조사 위원회」의 회장이었던 루이스 레보라 박사를 만났다. 그는 코르도바대학의 총장을 역임한 저명한 인사로서 금년 77세. 그러나 박력있는 음성으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위원회가 공식적으로 확인한 코르도바 지역의 실종자는 8백73명이었다고 한다. 접수된 실종자는 3천여명이 넘었으나 검증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그는 코르도바에 사령부를 둔 제3군은 특히 악명이 높았다고 회상했다. 한 보기로 이들은 주택가를 봉쇄한 후 가택 수색을 하면서 체 게베라 사진 같은 것이 나오면 무조건 젊은이들을 끌고 갔다고 한다. 이들 젊은이는 세 곳의 비밀 군기지에서 고문을 받고 기암 절벽 밑으로 버려졌거나 실종되었다. 그러니 부모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과거 청산이 잘 이루어졌다고 하는 아르헨티나에서조차 코르도바의 상처는 아직 완전히 아문 것같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 보니 내가 모르는 점이 많았다. 우선 대학의 역사가 마음을 끌었다. 코르도바대학은 1613년 창설된 아르헨티나의 가장 오래된 대학이자 미주 대륙 전체에서 두번째로 역사가 긴 대학이다. 16세기 중엽에 세워진 곳 고색창연한 교회들이 시내 중심의 대학을 둘러싸고 있다.

특히 감동을 준 것은 코르도바대학이 1918년 6월21일 공표한 대학개혁 선언문이다. 요지는 대학 공동체의 구성원이 대학의 의사결정에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코르도바대학은 평의원(COUNCIL)제도를 도입했고 교수 학생 졸업생 대표가 대의 기능과 집행부 감독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대학교육은 무료이다.

이 선언은 곧 남미 전체에 파급되어 페루 칠레 볼리비아 등에서 민족운동가들이 코르도바로 모여들었다. 또한 이 선언은 68년 유럽의 학생운동을 거치면서 프랑스 독일등에도 도입되었다. 내가 책을 통해 알게 된 코르도바의 강한 민중운동은 사실인즉 대학의 개혁정신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카를로스 메넴 아르헨티나 현대통령도 이곳 법대 출신이다.

이런 문화의 취향속에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인즉 나는 코르도바대학(8월 14일∼18일)과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8월 21일∼25일)으로부터 「오늘의 한국」세미나 참석을 바라는 초청을 일찍 받았다. 그런데 주최측은 현지 대사관을 통해 국제교류재단에 여비지원 신청을 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어렵게 되자 주최측은 나에게 무조건 올 것을 요청하는 다급한 전문을 보내왔다. 나는 이들이 어려운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제를 본격 다루겠다는데 안 갈 수가 없었다.

○「오늘의 한국」 세미나 열기

와서 보니 상황은 예상보다 더 나빴다. 미국에서 오기로 한 어느 교수는 최후의 순간에 목에 큰 이상이 생겨서 올 수 없다는 팩스를 보내왔다. 한국에서도 더 올 것을 기대했으나, 여비 지원이 안되어 나 혼자 온 셈이었다. 그런데 세미나는 이미 널리 공고가 된 상태였다.

놀란 것은 그 다음부터였다. 세미나가 열린 코르도바대학

도서관의 홀은 항상 꽉 찼고 세미나는 시종 알차게 이루어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라 플라타에서 열린 세미나에도 많은 학생들과 교수들이 모였다. 주제에 따라 질문은 다양했지만 특히 교육 노동 국가 학생운동 남북관계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 우리는 매일 밤 6시부터 10시까지 공식 세미나를 갖는 것외에 낮 11시∼2시 사이에는 학생들과 소규모 대화시간도 가졌다.

아무튼 우리도 최선을 다했지만 반응도 좋았다. 첫 날의 개회식에서 축사를 한 우리 대사관 정보문화관도 모여든 청중들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척박할줄 알았던 토양에 별로 거름을 준 것도 없는데 스스로 싹이 솟아나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들은 소규모라도 한국영화축제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여러번 말했다. 코르도바대학과 라 플라타대학의 한국연구팀을 잘 키워가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

세미나가 모두 끝난 후 우리는 한 마음이 되어 새벽까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다음 날 차를 타고 코르도바에서 서남쪽으로 1시간을 나오자 금방 산악지대가 나오고 아름다운 호수들이 나왔다. 마침 산 마르틴 휴가가 시작되어 곳곳에서 마을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문화적 뿌리에 자부심

우리는 방갈로에 머물면서 어느 법대 학생의 부모를 방문했다.

그 부모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 관해 잘 모르지만 올림픽이 인상적이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학생들의 통일운동이 감동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나의 손을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한국은 통일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것은 다소 뜻밖의 직격탄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순수한 직감 앞에서 마음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멀리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었다.

코르도바의 체험은 지방화의 과제에 많은 암시를 준다. 내가 만나본 지식인 학생 노동자는 누구나 자신의 문화적 뿌리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식인들도 코르도바의 전통에 대해서는 존경심을 표했다. 아울러 그들은 순수하고 정감적이었다. 내가 대학 개혁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고 하자 여기저기서 자료를 찾아 나에게 주면서 활짝 웃던 학생들의 모습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이런 지방의 향기와 친밀성이 사라진 세계화는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글=한상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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