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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청사진은 있는가(광복 50/다시 여는 반세기: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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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청사진은 있는가(광복 50/다시 여는 반세기:13)

입력
1995.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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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협력 없는 어떤 방안도 공허/평화구축·불신해소 노력이 최우선/신뢰바탕 남북 공동밑그림 바람직김일성 사망직후인 지난해 8월15일 김영삼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을 발표하면서 『자유민주주의에 의한 통일만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남북한간의 체제경쟁은 끝났다』는 선언과 함께 발표된 이같은 입장은 우리측이 그리는 통일의 청사진을 가장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홍구 통일부총리는 『이제는 북한에 대해 우리의 생각을 분명히 알리는 것이 도리어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그래야만 북한도 우리의 노선을 따를 것인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부연 설명 했다.

분단 50년동안 남북 어느한편에서 내놓은 통일국가의 청사진은 다른 한편에는 공포의 대상이 돼왔다. 한편이 적극적인 통일방안을 제시하면 다른 한편은 이를 회피하기 위해 그림을 바꿔 그리는 일을 되풀이 해왔다.

70년대까지는 북한이 적극적 이었던데 대해 80년대 이후는 남측이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것 정도가 바뀌었을 뿐이다.

지난해의 광복절 경축사는 남북간 국력의 격차가 너무나 벌어졌음을 감안해 이같은 악순환이 끝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 이었다. 김일성사후 혼란을 눈앞에 둔 북한이 체제붕괴를 맞든지 남측을 따르든지 양자택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정세판단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년뒤인 올해의 광복50주년의 경축사는 『통일에 대한 환상적인 기대도 성급한 포기도 금물』이라는 입장만을 짤막하게 밝혔다. 1년사이에 통일의 청사진이 도리어 모호하고 흐릿한 그림으로 바뀐 것이다. 우리측에서 보면 통일이 도리어 멀어진 것과 같은 인식의 변화이다.

이같은 후퇴는 역설적으로 너무나 명확한 청사진을 서둘러 제시했기 때문에 빚어졌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북한은 대화재개 조건중의 하나로 자유주의 통일방안의 취소를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그리는 청사진이 도리어 통일을 멀어지게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분단50주년 이후에도 이같은 상황은 당분간 지속 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독일의 경우를 보자.

독일은 통일직전 점진적인 통합을 상정한 20단계의 통일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통일은 이 청사진과 무관하게 이뤄졌다. 청사진대로 통일과정이 진행된 국가는 역사상 없다.

남북한 한편의 체제붕괴가 없는 한 통일의 청사진은 어느 일방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쌍방이 함께 그리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같은 공동작업에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는 해결해야 될 문제들은 너무 많다.

이같은 선결과제가 무엇이냐를 찾아낼 때까지 새로운 통일방안의 제시는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볼 수 없다. 정부가 통일방안제시보다는 평화체제구축, 불신해소를 위한 협력사업등 실질적인 방안등을 강구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인식변화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봐야한다.

북한은 80년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제시이후 정리된 통일방안을 내놓고 있지 않다.북한은 조만간 7차 당대회를 통해 체제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통일방안을 제시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의 새통일방안은 91년 신년사등에서 제시됐던 1민족1국가 2제도2정부를 체계화한 것으로 연방제를 최종적 형태의 통일국가로 정착시키자는 내용을 담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같은 방안이 통일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체제보존을 위한 시간벌기에 주목적이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유승우 기자>

◎국내정치와 남북관계 변천/정치상황따라 냉각­해빙 반복/「7·4공동성명」서 최근 「쌀회담」까지 정국과 깊은 관련

통일정책은 숙명적으로 국내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

해방 이후 남북한이 추진해온 각종 대화의 배경에는 시종일관 국내정치적인 수요가 있었다. 남북관계는 이같은 수요 때문에 변하고 또 그 변화의 결과가 각각의 국내정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지난 6월21부터 25일까지 베이징(북경)에서 개최된 쌀지원을 위한 제1차 남북당국간 회담을 들수있다.

이 회담이 6월27일에 치러진 4대지자제 선거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흥미로운 분석의 대상이다.

최초의 남북간 공식직접대화인 적십자회담 예비접촉(71년9월부터 73년8월)에서부터,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박성철 부수상의 상호비밀방문, 7·4공동성명,남북조절위개최등의 과정만 봐도 그렇다. 2년 가까이 계속된 이 대화를 전후로 남북의 체제는 약속이라도 한듯이 헌법을 바꾸는등 큰 변화를 겪었다.

이 대화는 베트남적화통일, 닉슨독트린등 국제정세의 변화에 주로 기인했던 것으로 흔히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남북한 당국이 각각 국내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대화를 추진하게 된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남측은 71년 대선에서의 고전이후 민주화운동등으로 정통성이 상당부분 약화돼 있었다. 북측은 69년 허봉학 군참모장겸 대남담당비서등 이른바 좌파분자 숙청이후 김일성유일체제을 확립해 가는 과정 이었다.

공교롭게도 남북은 72년 7·4공동성명 발표 이후 대화가 계속되는 와중에서 독재체제 확립을 위한 헌법개정을 단행하게 된다. 남측에서는 3개월뒤인 10월17일 유신헌법이 공포됐다. 다시 2개월뒤인 12월27일 북한도 사회주의헌법을 제정, 국가주석제를 신설, 이른바 수령론을 제도화했다. 그리고 1년뒤엔 김정일이 당중앙위 5기7차전원회의에서 후계자로 공식지목됐다.

북한전문가들은 남북한의 대화행태를 일반화해 규칙성을 찾아보려고 한다. 허문녕 민족통일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북한은 ▲경제사정 ▲남측의 정치적 안정도를 감안해 가며 대화에 나선다고 분석했다. 북한의 국내정치적 수요에 의해 대남정책이 좌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은 남측의 정권이 약화돼 정치적 혼란기에 접어들었다는 판단이 서면 대화에 응하는 법이 별로 없다는것이다. 5공화국이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84∼85년에는 수재물자인도, 이산가족교환방문이 성사됐고 경제·국회·체육회담등 16차례의 남북대화가 있었다. 이 시기는 북한이 합영법제정후 경제개방의 실험을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헌운동이 본격화한 86년부터 북한은 사실상 대화를 중단했다.

쌀지원으로 시작된 베이징회담을 계기로 정상회담의 재추진이 시도되고 있는 현재 북한이 남측의 국내정세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는 아직 불투명하다.<유승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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