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를 건너가는 기억이윤학의 시집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는 극찬을 들어 마땅하다. 그 표지의 날개에서 읽게 되는 「무섭도록 아름답다」는 소개의 글은 결코 빈 말이 아니지만, 그 특이한 아름다움을 설명하려면 말이 궁색해진다. 어쩌면 무섭고도 아름답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시어는 냉정하게 절제되어 차라리 소박함을 느끼게 하는데, 억압된 나머지 거의 평온한 상태를 누리고 있는 슬픈 감정들이 그 시구를 따라 체념한듯 무심하게 떠올라오는 순간이 섬뜩하다.
이윤학에게 삶은 황폐화의 느린 진행이며, 세상에 남은 것은 오직 상실의 흔적뿐이다. 인간에게 미래의 결실 같은 것은 없으며, 「붉은 열매」는 언제나 과거의 기억에 속한다. 「추억은, 폐허를 건너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닌가」 옛날 돼지막이었던 「한낮의 풀밭」에 이제 금이 간 채 남아있는 커다란 사료 항아리를 바라보며 시인이 하는 말이다.
사람과 세상 사이에 그 인연이 분단된 정황을 폐허라고 이른다면, 기억은 그 무정한 물건들이 우리의 정신에 다시 동화되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기억은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기억의 내용이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이루지 못한 열망과 그에 대한 서러움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기억은 불현듯 환하게 솟아 올라 묵은 상처에 다시 한 번 칼질을 하고 사라진다. 그리고는 한 순간 용해되었던 사물들 위에 다시 먼지를 부를 것이며, 한층 더 두터워진 폐허 아래 가라앉을 것이다. 그 환한 「창고」에서 나올 때마다 시인은 그래서 「빠뜨리지 않고 문을 걸어 잠근다」 언어가 절제되듯 기억 또한 절제되는 것이 옳다.
게다가 때로는 기억에 대한 환멸이 기억보다 앞서기도 한다. 여섯 행의 짧은 시 「민들레」에서 시인은 그 꽃이 「누군가의 머리핀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다」고 말한다. 「저 유치한 민들레꽃!」 민들레의 유치함이란 그것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던 날의, 또는 그것을 모방한 머리핀을 샀던 날의 유치함이다. 「받아라」 「너 가져라」 무심결에 민들레를 꺾었던 두 사람이 이렇게 거기서 얻게 될 실망감을 서로에게 떠넘기려 하는 것으로 시가 끝난다. 그러나 시인이 정작 표현하려는 것은 이 떠넘기기가 아닐 것이다. 민들레 한 송이를 부담으로 여겨 부지불식간에 내뱉었던 그 말들에 대한 성찰, 시가 암묵해 버리는 반성일 것이다. 민들레는 또다시 내 손에 있는데 나는 무엇이 되었는가.
이윤학의 아름다움은 기억의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기괴하게 사물을 찢고 나타나, 슬픔이건 분노건 우리가 감정을 지닌 「사람」들인 것을 꼼짝없이 알려주고 사라진다. 그러나 그의 시는 추억을 부르는 기술이기보다 그 고통을 모질게 응시하는 윤리학이다.<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문학평론가·고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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