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 유정회의원 출발 화려한 정치행보/3당 합당후엔 「김대통령 만들기」 앞장도「조정과 타협의 명수」「킹메이커」「6공이후 최다요직을 거친 실세중의 핵심」. 21일 민자당 대표위원에 오른 김윤환 의원에게 따라붙는 별칭들이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대표는 6공부터 현정권에 이르기까지 줄곧 집권여당의 핵심에 있었다. 민정당과 민자당에 걸쳐 사무총장 2회, 원내총무 2회, 정무1장관을 3회나 맡은 이력이 이를 잘 말해준다.
김대표는 지난 73년 9대총선에 경북 군위·선산·칠곡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낙선한 것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어 79년 10대 유정회의원으로 국회에 들어온뒤 5공출범과 함께 민정당 전국구의원(11대), 문공부차관, 대통령정무수석·비서실장등의 순탄한 정치행로를 밟는다.
6공출범후 김대표의 화려한 정치행보는 그가 노태우대통령과 경북고동기생이라는 지연및 학연에다 남다른 친화력과 협상력, 뛰어난 현실감각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선 그의 친화력은 민자당내에서 계파를 초월해 상당수의원들이 그의 주변에 몰리고 있는데서 나타난다. 최근 그가 대전에서 「3김퇴진」을 주장하기 전까지만해도 여권내에서 야당과 「물밑대화」가 가능한 몇 안되는 인사중의 한사람으로 여겨졌다.
그의 정치감각과 현실판단력이 뛰어나다는 반증은 그가 5 ·6공정권이양 과정에서 「대통령만들기 1등공신」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특히 3당합당후 김영삼 대통령의 대권쟁취 과정에서도 그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민자당내 친YS세력을 「추대위」로 결집해 김대통령의 대통령후보 경선승리를 이루었고 대선과정에서도 TK세력의 표몰이를 주도, 결과적으로 김대통령의 낙승을 가능케했다.
그러나 현정부출범이후 지난해 말 개각에서 정무1장관으로 기용되기까지 1년10개월여동안은 그에게 시련기였다. 정무1장관으로 복귀한 뒤 김대표는 서서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신주체론」으로 민주계와 미묘한 갈등을 빚었는가하면 지방선거패배후에는 「개혁과 안정 병행론」을 들고나와 주목을 받았다.<신효섭 기자>신효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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