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대통령의 광복절경축사에 「획기적 대북제의」가 없다고 실망한 사람들이 있는 것같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번에 「획기적 대북제의」를 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언론보도에 의하면 청와대는 쌀문제로 인한 국민감정을 고려해서 대북제의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나는 이런 보도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쌀문제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8·15 경축사같은 공개적인 방법으로 「획기적인 대북제의」를 하는 것은 비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남북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공개적인 방법으로 북한에 어떤 제의를 한다는 것은 실제로 북한이 그런 제의를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남북관계의 성격상 남과 북은 모두 상대방이 내놓는 제의의 내용이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이 자신의 제의가 아니라 상대방이 내놓은 제의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제의에 동의하기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다. 즉 상대방에게 주도적 역할을 허용하는 인상을 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상대방이 받아 들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8·15경축사같은 공개적인 수단을 이용하여 상대방이 자신의 제의에 동의할 것을 촉구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둘째로 광복절마다 「획기적인」 제의를 하게 된다면 대북정책의 인플레현상을 유발할 수 있다. 특히 여론을 중요시하는 정치적 환경에서는 과거의 획기적인 제의보다 더 획기적인 제의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조성됨으로써 제의를 위한 제의를 하는 모순을 낳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책은 일관성을 상실하게 되고 남북문제에 대한 원칙 대신 현실성없는 수사만 늘어나게 된다.
그런데 남북문제에 대한 제의의 인플레문제는 북한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남한만의 문제다. 북한은 수십년동안 똑같은 입장만을 되풀이 해오고 있다. 물론 북한의 경우에도 그들의 정책발언 내용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상황변화에 따라 강조점과 뉘앙스가 변해온 것을 발견할 수 있지만 남한과 비교해 보면 그들은 원칙문제에서는 김일성의 사망 이후에도 계속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남한의 경우는 정반대다. 지도자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통일방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새 대통령은 새 정책을 선언하면서 출발하지만 결국에는 북한체제라고 하는, 우리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에 부닥쳐 현실인식의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뭔가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하는 국민의 염원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우리의 목적달성을 본질적으로 부정하는 북한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남한정부는 불필요한 방황과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모색을 반복하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개적이고 획기적인 제의가 아니라 기본적인 원칙과 실현가능한 전략이다.
원칙은 목적의 정의를 말한다. 우리의 가치관,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 우리가 믿는 정통성의 개념, 이런 기본문제에 대한 입장정리가 없는 한 우리의 대북정책은 무원칙할 수 밖에 없다.
전략은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동기획을 뜻한다. 대북제스처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행동이 우리의 정책목표에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쌀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쌀제공이 우리의 대북전략의 전체 틀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략이 없으면 모든 행동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 쉽다. 그러니까 쌀을 제공하는 행동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되어 버린다. 심지어는 북한이 우리 쌀을 받아주기만 하면 우리는 일단 성공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민주국가는 대외정책에 있어서 어려운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북한은 국민의 기대와 염원을 생각지 않고 우리와의 게임을 운영하고 있지만 한국정부는 국민의 알 권리와 정책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전제로 대북정책을 펴나갈 수 밖에 없다. 우리의 게임운영에 문제가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민주국가는 독재정권이 갖지 못하는 강점이 있다. 국민의 지지와 판단이다. 민주정부는 국민에게서 나오고 국민으로부터 힘을 받는다. 그리고 국민들 가운데는 「획기적」인 대북제의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절대다수는 근본적인 가치와 원칙을 더 중요시한다. 그리고 실제로 구체적인 결과를 보았을 때 정부를 지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기본적인 원칙문제에 대해 국민합의를 존중해야 하지만 순간순간의 여론에 집착하지 말고 구체적인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 때까지 꾸준하게 자신의 전략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김경원 사회과학원장>김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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