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고도의 여정/박승평(일요 시론)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고도의 여정/박승평(일요 시론)

입력
1995.08.20 00:00
0 0

옛 총독부건물 첨탑이 잘려나가던 날 뉘라서 일말의 감회가 없었을까. 필자에게도 새삼 상기되고 가슴에 와 닿는게 있었다. 그것은 8·15 불과 며칠전 태평양의 한 고도에서 우연히 겪어야 했던 갈등과 짙은 여정때문이었다.불과 제주도 10분의 1크기의 서태평양 절해 고도중 하나이면서도 쪽빛 맑은 바다의 풍랑과 역사적인 2차대전 유적으로 말미암아 최근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는게 그 섬이다.

그곳에는 2차대전막바지 일본패잔병과 가족들이 상륙미군에 쫓긴 나머지 「천황만세」를 외치며 80아래로 뛰어내린 소위 「만세절벽」과 「자살절벽」이 있다. 또 당시 일본의 태평양함대사령관이었으며 지금은 군신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다는 야마모도 이소로쿠의 최후항전 지휘바위굴사령부 터가 있다는가 하면 인근의 새끼섬 티니안은 히로시마 원폭탑재 「애놀라 게이」기의 발진기지로 역시 유명하다. 종전 50주년을 앞두고 그들의 옛 고토이기도 했던 그곳에 일본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는건 이해할만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정작 놀랐던건 마치 성역마냥 말끔히 단장된 유적비의 비문을 보고서였다. 불과 3년전인 헤이세이(평성) 4년에 건립된 한 비문에는 그들 패잔병들이 나라에 대한 충성과 세계평화를 위해 절벽아래로 뛰어내려 산화했다는 뜻의 구절이 분명 돌에 음각되어 있었던 것이다.

력사나 생존자증언을 통해 밝혀진 것처럼 한국서 끌고간 우리 정신대 여성들마저 절벽아래로 뛰어내리길 강요했던 잔혹한 그들이었다. 무자비하고 맹목적으로 침략과 천황숭배에 광분했던 그들이 이제와서 아무 거리낌없이 「세계평화」를 앞세우며, 그곳을 마치 일본정신의 성소인냥 떠받드는 걸 보면 누구라도 역겨움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섬에는 징용이나 정신대로 끌려가 고혼이 된 우리나라 사람들을 기리는 한국인 위령탑도 세워져 있어 그래도 일말의 위안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위령탑 건립내력과 헌금자를 밝히는 비석의 일부가 길게 파헤쳐져 내용이 손상되어 있었고, 그 경위를 알고는 또한번 전율할 수 밖에 없었다. 한 전직 권력자와 그 부인의 이름을 그의 퇴임후 논란끝에 파버렸다는 것이 아닌가.

남들은 민족정기나 정체성의 발양을 위해서는 없었던 일도 만들고 갖다붙여 「세계평화」 운운도 불사한다. 그런데 우리는 세계의 관광객들이 오가는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까지 애써 만들었던 비석조차 깨뜨리며 사서 망신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밴댕이 소갈머리」로 언제까지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일까. 벼르고 별러 찾아간 고도에서의 여정이 착잡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석문제는 사실 어느 정권의 누가 옳고 그르다는 차원의 것이 결코 아니다. 그같은 작은 일만으로도 우리의 광복50주년 정리나 제2의 광복50년 준비태세에 아직도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하는데까지 생각이 비약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심사는 일본이 과거사를 잡음없이 시치미 떼며 온갖 일을 빈틈없이 세계에서 앞장서 잘하면 잘 할수록 더욱 뒤틀릴 수밖에 없는게 아닌가.

종전50년을 맞은 어느 일본신문의 사설은 한국의 발전이 너무 눈부시기에 한국민에게 거듭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면서도, 일본으로서는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아시아에서 서구지배지역에 비해 일본지배하에 있었고 전시중 많은 고생을 끼쳤던 일본 식민지들이 훨씬 발전해 기쁨을 감출수 없다는 등등의 고약한 기술을 한바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건 일본을 욕하고 옛 총독부첨탑을 자르는 차원으로만 끝날 일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과의 문제이기에 앞서 우리자신의 문제라는 생각이, 그래서 우리는 민족정기나 정체성을 더 높여 당당한 이웃나라로 일본과도 공존해 갈 수 있는 여유와 슬기로움을 축적해가야겠다는 생각이 꼬리를 무는 것이다.

엊그제 슈미트전서독총리는 TV대담에서 섬나라 일본의 대한 경계성향을 지적하면서도 한국은 통일을 위해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뒤틀렸던 고도에서의 여정을 이제 차분히 정리해야 하겠다.<수석논설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