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입때마다 짓눌리는 위압감이나는 종로구 내수동에서 태어났다. 골목을 두어번 꺾어 큰길로 나서면 야주개시장이 있고 골목어귀에 고무신가게와 목욕탕이 있었다. 내수동집에서는 고작 간 곳이 학교와 배화고녀근처 내자동 금칭교 시장 보인상업학교 당주동 정도였고 어쩌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총독부 근처까지 가곤 했다. 총독부 근처에는 높은 집이라고는 없었으며 드넓은 육조거리 가운데 전차가 다녔고 륙조건물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총독부건물은 엄청나게 크고 무서웠다. 창같이 생긴 철책과 철문 앞에는 일본순사가 칼 차고 서 있었다.
매동국민학교 2학년때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이 심해져 창동으로 소개되어 갔다가 부모님따라 전라도 익산 산속에서 숨어 산뒤 해방이 되어 돌아와서는 흑석동 적산가옥에 살며 덕수국민학교를 다녔다. 졸업후 경복중에 들어가 매일 구총독부건물 앞과 옆을 지나 다녔으며 경복궁 뒷길도 자주 다녔고 점심시간에는 북악산 꼭대기에도 가끔 올라갔다.
그뒤 서울대문리대 졸업후 공사교관으로 재직하다가 제대후 박물관에 들어왔다. 박물관은 그때 덕수궁에 있었다. 10년쯤 근무하고 지금 경복궁에 있는 민속박물관 건물로 이사한 것이 72년이었다. 86년 이후에는 구조선총독부 건물에서 근무하고 있다.
50년간 서울에 살며 학교와 직장생활을 종로구에서만 하는 동안 총독부건물과는 악연이 끊이지 않았다. 일제시대에는 무서워 멀리 바라보기만 하였고 중·고교시절에는 저 건물이 총독부였지 하는 생각으로 기분좋지 않게 지나다녔다. 덕수궁·경복궁 박물관시절에는 공무상 몇번 드나들었지만 중앙청근무자들이 박물관직원쯤은 우습게 보고 딱딱거려 괜히 눈치보며 괴물같은 이 건물에 다녀간 일이 있다.
81년 전두환대통령때 이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해 사용하게 됐다. 그후 83년과 84년초까지 어떻게 하면 박물관으로 적절히 사용할 수 있을까 하고 개축설계자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일이 있다. 또 그 일을 위해 정부가 이사간 폐허같은 속을 설계자와 누차 둘러보고 미국 일본의 최신 박물관을 중심으로 자료조사를 다녀와 개축공사에 관여한 일이 있다.
이 건물은 사무실로 지었지만 외형 내부구조 장식이 위압적이고 억압적이며 한반도는 물론 전세계를 압도·지배하려는 상징적 조각과 문양으로 가득 차 있다. 남쪽 중앙의 좁은 현관으로 들어서면 바로 가파른 계단이 있어 고개를 치켜 하늘을 우러러 보듯 해야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돌집인 것같지만 철근콘크리트 라멘조로 표면에만 화강석을 붙이고 이면은 모두 인조석이다. 중앙돔 위의 첨탑도 인조석이며 아래 위에 동판을 씌우고 피뢰침을 달았다. 사무실 건물이기 때문에 천장이 낮아 전시실로는 부적합하고 2∼4층 전시실의 동선이 똑같아 변화가 없다. 바닥슬래브에는 철근 없이 철망만 넣어 얇아서 내려 앉을 것같아 철근배근을 다시 하고 콘크리트를 쳐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어렸을 때는 두렵기만 했고 성장해서는 관료적이고 권위적인 건물이었으며 지금도 해방전 총독부를 바라보는 기분이다. 남쪽 사무실에서 근무하며 창문을 열어 비뚤어진 광화문과 세종로를 바라보며 과거 정치의 중심이 전통문화의 중심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북쪽 창문을 열고 근정전과 북악일원을 마음대로 바라보며 자연과 같이한 청신한 옛 문화의 여운을 깊이 숨쉬는 즐거움이 있지만 이 집을 들고 나설 때면 언제나 순국선열의 원혼이 서려 있는 것같고 가슴 한 구석이 짓눌리는 것같은 위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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