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전 오늘을 보다니…”/“벅찬 마음뿐” 노안엔 이슬/「옥고」 옛 서대문감옥 둘러보며 “만감”/20년만의 귀국 “통일이 마지막 소원”평북 강계땅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유공자 김경하(미국 미시간주 사우스필드시거주)옹. 생전의 독립유공자중 최고령인 1백세의 김옹에게 올해의 광복절은 생애 최고의 감격스러운 날이다.
90년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20여년만에 조국땅을 밟은 김옹.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던 젊은 교사는 휠체어에 의지한 백발로 돌아왔지만 귓전에는 지금도 그날의 만세소리가 쟁쟁한듯 14일 옛 서대문감옥을 둘러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자원봉사자가 공원 한편의 옥사근처를 가리키자 『이곳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많은 애국지사들과 함께 고문과 악형에 시달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남자옥사 건너편에 여자옥사가 있었는데 안보이는걸 보니 헐린것 같군요』라며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말았다. 서대문감옥은 김옹이 1919년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6월형을 선고받고 2심재판을 기다리면서 투옥됐던 곳.
김옹은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광복50주년 경축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 10일 고국땅을 밟았다. 미국 디트로이트 한인연합장로교회 원로목사로 있는 장남 득렬(68·전연세대 신과대교수)씨를 따라 이민간지 20여년만의 귀국이다.
1919년, 그는 평양 숭실대 문과를 졸업하고 모교인 평북 강계읍 영실중 교사로 재직중이었다. 3월1일 전국적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그는 동료교사, 학생들과 함께 거사를 계획했다. 강계 장날인 4월8일 상오11시를 기해 제자 2백여명을 이끌고 북과 나팔을 울리며 만세행진을 주도했다. 선두에 섰던 김옹은 동생 명하(당시 18세)씨와 함께 현장에서 체포됐고 동생은 고문 끝에 숨졌다. 평양감옥에 투옥중 고문후유증으로 병보석돼 풀려난 김옹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25년 귀국해 황해 신천읍에서 목사로 일하며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해방직후 월남, 서대문·신촌장로교회등에서 목회활동을 하다 66년 은퇴한 뒤 71년 장남을 따라 미국이민길에 올랐다.
지난 90년 뒤늦게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전달받은 김옹은 『짧은 기간에 놀랍게 발전한 조국이 너무나 자랑스럽다』면서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남한도 북한도 아닌 대한민국 사람으로 살아가는 행복을 느껴보고 싶다』며 남북통일을 기원했다.
이날 김옹의 독립공원 나들이에는 친일파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한 전명운 의사의 딸 경영(72·재미사회사업가), 김좌진 장군의 딸 순옥(67·중국 헤이룽장성 거주), 고종황제의 외교고문을 지낸 미국인 헐버트씨의 아들 리처드 헐버트(67)씨등도 동행했다.<고재학·박희정 기자>고재학·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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