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50년은 분명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볼만한 역사적 시점이다. 독립운동가 김준엽 선생은 광복 50년의 우리를 70점으로 채점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감안하더라도 잃은 나라를 되찾았고 빈곤의 악순환에서 나라를 이만큼 만들어 놓은데 대한 감회 어린 평가이리라.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역사의 교훈과 국제정세를 바로 읽고 외화는 제발 그만하고 실속 있는 삶의 터전을 마련하여 통일에 대비해 나가는 것이다.우선 냉전 후 4대국의 동향과 역할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는 앞으로도 우리의 대외관계의 초석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냉전시대의 한미관계가 주어진 여건이요 상수였다면 앞으로의 한미관계는 우리의 자율적인 노력과 역량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변수이다. 한미간에 명실공히 외교가 시작된 셈이다. 러시아는 그들의 국내정치의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남북한 관계, 특히 비핵화를 추구하는데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며 한반도냉전의 장본인이면서도 미국과 함께 우리의 평화통일노력에 도움이 되도록 유도할 수 있는 나라다. 중국은 북한의 동향과 운명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변수이다. 중국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과잉관여나 한국에 의한 급속한 통일이니셔티브를 원치 않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한반도 현상유지정책이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자칫 한반도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국정방향 설정에 있어서 경제면에서 이해관계가 가장 큰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의 중견기업의 대한투자유치를 통한 효과적인 기술이전, 언젠가는 들이닥칠 통일과정에서의 일본의 경제적 역할은 쉽게 예상할 수 있으며 그것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조정하는 일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 다음 한국정치에 있어서 남북한관계는 비극의 씨앗이기도 하고 희망의 원천일 수도 있다. 북한은 체제유지라는 부동의 전략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전략목표 자체가 모호하다. 북한은 전략실천을 위한 목적합리성에 철저하기 때문에 무리한 전술적 수단을 아무런 가책없이 동원하고 있고 한국은 합리적인 제안을 하면서도 얻은 것이 없다. 제로섬상황에서는 합리성이 「목적합리성」앞에 속수무책이기 때문에 말을 먼저 꺼낸 쪽이 초라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전략목표는 대한민국체제의 안정과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통일이다. 따라서 이 목적달성에 걸림돌이 되는 대북한정책의 선택은 백해무익하다. 즉흥적인 제안이나 불필요한 자극을 하지 말고 기다림의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무위로 때를 놓쳐서는 안되니 여기에 남북한관계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남북한 간에 공통이익이 되는 항목부터 하나씩 하나씩 챙겨나가는 길 뿐이다. 이를테면 미국과 일본의 대북한관계 정상화나 한국기업의 대북한진출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선택하는데 너무 인색할 필요가 없다.
끝으로 뭐니뭐니 해도 4강외교와 남북한관계의 견실한 바탕을 이루는 것은 우리 국내의 통합이다. 우리국민은 오랜 역사적 체험을 통하여 개인이나 가족단위의 활력이 가공하리만큼 억세다. 그래서 그 다이내미즘이 오늘의 한국을 이뤄 놓았다. 그러나 바로 그 활력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동양식으로 나타나 한탕주의, 적당주의, 구조적 부패로 이어졌고 결국은 우리국민 전체의 타성으로까지 자리잡게 되었다. 삼풍사건은 한 마디로 우리 수준의 총체적 표현이다.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권력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안전이다.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최우선 순위의 과제는 총체적 안전관리의 제도화와 그 치밀한 실천이다. 이번엔 인사도 그 기준에서 해야 한다. 세계화와 우리의 현실 사이의 거리를 메우는 일이 시급하다. 5공때 가는 곳마다 붙어 있던 정의사회구현이라는 구호를 누가 믿었겠는가?
물론 우리에게는 반도체도 있고 조수미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직 「삼풍」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삼풍자본주의」의 극복없이는 우리 사회의 질적 비약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에게 있어서 세계화는 세계화의 준비에 다름아니며 「나」와 「지방」과 국가의 수준을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내실화하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내실화가 제대로 되면 그때는 세계화라는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정신을 빨리 차릴수록 좋다. 8·15를 한이나 신바람보다 내성의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고려대 아세아문제 연구소장>고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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