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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50/다시 여는 반세기: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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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50/다시 여는 반세기:10­3

입력
1995.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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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총독부건물 영욕의 역사/일제·미군·공산군 거치며 잇단 수난/총독 7명 거친 한반도 강점 심장역­해방전/전쟁·정부청사 겪은후 박물관으로­해방후구 조선총독부 건물(현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앙돔 첨탑이 15일 상오 철거된다. 일제강점의 상징이 우리 땅에 지어진지 69년, 광복 50년만에 비로소 일제가 우리 땅에 박은 가장 큰 쇠말뚝의 제거작업이 본격화한다. 건물 철거작업이 내년말 완료되면 조선왕조의 정궁 경복궁 복원사업의 마지막이자 최대 걸림돌이 해결된다.

이 건물은 근·현대사의 왜곡과 굴절을 가져온 중심축. 해방전에는 일제의 한반도강점 본영이었고 해방후 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기 전까지는 대한민국 권력의 산실이었다. 국토분단에 이은 동족상잔의 비극, 4·19혁명, 5·16군사쿠데타, 12·12, 그리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단초를 연 5·17비상계엄 확대조치등 현대사의 소용돌이를 지킨 현장이기도 하다. 건물주인도 일제, 미군, 공산군을 거치는등 3차례나 바뀌어 우리 민족의 험난했던 과거를 보여준다. 대한민국 출범직후 이승만 초대대통령은 한때 일제잔재청산 차원에서 철거를 지시했으며 80년대 중반에도 철거가 검토됐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건물은 초대총독 데라우치(사내정의)의 「조선총독부신영」계획에 의해 1916년 7월10일 착공, 10년여만인 1926년 10월1일 완공됐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총독부는 남산의 왜성대에 있었으나 준공을 앞둔 1926년 1월 이곳으로 이전, 아베노부유키(아부신행)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한반도강점의 심장부역할을 했다.

경복궁 근정문 앞에 5층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조선호텔을 설계한 독일건축가 게오르게 라란데의 설계를 기본골격으로 삼았다. 1914년 8월 라란데의 죽음으로 세부설계는 일제의 대만총독부건물 설계자 노무라 이치로(야촌일랑)와 한국인 박길룡이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지 2만9천4백81평, 건평 1만1백26평, 공사비 6백35만1천4백82원, 콘크리트 사용량 3천2백48입평, 철근사용량 3백30여톤. 연인원 50여만명의 한국인이 노역에 동원됐고 전국에서 각종 자재가 수탈당했다. 화강암과 대리석은 동대문밖 돌산에서 20만톤을 채취, 일본인과 중국인 3백명을 동원하여 다듬었으며 지붕의 구리돔제작에 2만4천8백70근의 동판이 들었다.

건축양식은 근세르네상스식으로 일제의 오만과 위엄을 강조하는 외관이 특징이다. 총독부는 준공당시 동양 최대 규모로 영국의 인도총독부나 네덜란드의 보르네오총독부를 능가했다. 상공에서 보면 총독부는 「일」자, 경성부청사(1926년 준공)는 「본」자로 청와대 뒤편 북악산의 「대」자 형태와 더불어 「대일본」의 형상을 이룬다. 풍수지리상 경복궁은 「작약예화(작약꽃)」모양의 명당. 작약의 암술에 해당되는 곳이 임금이 집무하던 근정전. 풍수전문가들은 일제가 총독부와 함께 1927년 과거장등을 폐쇄하고 총독관저를 지어 『조선의 입(총독부)을 막고 목(청와대)을 누르려 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총독부의 건축에 따라 광화문·홍례문 교태전등 전각 4천여칸이 헐렸다. 중국 베이징(북경) 의 자금성(9천9백99칸) 에 버금가는 7천여칸의 궁전이 일제의 횡포로 위엄을 잃게 됐다. 당시 일본의 미술사가 야나기 소에츠(유종열)는 『조선이 일본을 병합, 도쿄(동경)궁성을 헐고 그 자리에 총독부청사를 지어도 괜찮단 말인가』라고 비판했다.

일제는 민족정기 말살차원에서 일부러 건물을 삐뚤어지게 짓기까지 했다. 92년에 경복궁복원을 위해 실측조사를 했던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서울의 중심축을 이루는 경복궁의 담을 허물고 일부러 3.5도쯤 동북쪽으로 비뚤어지게 건물을 지었다』며 『지금의 광화문도 제 위치가 아니며 경복궁내 모든 건물의 배치가 뒤죽박죽 되어버린 것은 물론 서울의 기본축도 흔들려 버렸다』고 지적했다.

▷해방이후◁

45년 9월9일 미국의 하지중장은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마지막 총독 아베와 조선군사령관 고즈키(상월)로부터 항복문서를 전달받았다. 48년 7월24일 청사광장에서 이승만초대대통령이 취임식을 가졌고 미군으로부터 건물을 인수한뒤 그해 8월15일 정부수립기념식이 거행됐다. 건물명칭은 미군정청의 「캐피털 홀」을 직역한 중앙청으로 불리게 됐다.

한국전쟁때 3개월간 적치하에 들어갔던 중앙청은 공산군이 철수하면서 불을 질러 내부가 전소됐다. 다시 제 모습을 찾은 것은 정부종합청사로 문을 연 62년 11월22일.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이 2억7천여만원을 들여 복구한 뒤였다. 중앙청은 3공화국시절 경제부처의 과천분가에 이어 83년4월 국무총리실등의 이전을 끝으로 권력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마감한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용도변경이 최종 결정된 것은 83년 5월. 당시에도 철거여론이 높았지만 2백여억원을 들인 개·보수공사를 거쳐 86년8월21일부터 지금까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의 철거결정이 내려진 93년 8월이후 일본인 관광객들이 건물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들어 여러가지를 시사해준다. 50년 9·28 서울수복의 주인공인 당시 해병 1연대 2대대 6중대 1소대장 박정모씨와 견습해병이었던 최국방씨의 국기게양식 재연행사도 94년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듯이 치욕의 건물도 내년말이면 사라지게 된다.<박천호 기자>

◇총독부건물 연혁

▲1912∼13년 건물설계 기초조사

▲1916년 7월10일 착공

▲1926년 10월1일 준공

▲1945년 9월9일 하지장군, 아베총독으로부터 항복문서 서명받음

▲48년 5월31일 제헌국회 개원식

▲48년 7월24일 이승만초대대통령 취임식

▲48년 8월15일 정부수립. 정부청사(중앙청)로 사용

▲50년 9월29일 중앙홀서 서울 환도식 거행

▲61년 9월∼62년 11월 한국전쟁때 파손된 부분 복구공사

▲83년 9월∼86년 8월 국립 중앙박물관으로 개축공사

▲86년 8월21일 국립 중앙박물관 이전개관

▲93년 11월 철거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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