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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50/다시 여는 반세기: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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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50/다시 여는 반세기:10­2

입력
1995.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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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반세기 10대 뉴스/분단아픔 딛고 번영의 길로…분단 50년, 광복 50년 한국 현대사는 신생 대한민국의 국력과 국제적 위상을 선진국 문턱에 올라서게 한 번영이라는 이면 속에 수많은 정치적 질곡을 경험한 파란만장한 반세기였다. 한국일보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광복이후 정치 사회 경제등 한국현대사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10대 사건을 본사 전기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선정했다.<편집자 주>

◎38선 설정/45·9·2

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미국은 한반도 북부에 진주한 소련과 한반도를 북위 38도선에서 분할 점령,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이 방침은 일본항복후 맥아더 사령관에게 일반명령 제1호로 하달됐고, 미국은 군사적 편의에 의해 북한에 대한 기득권을 소련측에 넘겨줬다. 이후 38선 이남에서 미군에 의한 군정이 이루어지는 동안 소련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던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정권 수립이 준비돼 갔다. 38선을 사이에 두고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두개의 정권이 탄생하면서 38선은 자연히 국경아닌 국경으로 굳어져 갔다. 38선은 포츠담회담 당시 미 육군이 제안한 안이다.

◎정부수립/48·8·15

남북협상 또는 국제회의를 통한 한반도 통일정부 수립이 무산되면서 남한에서는 48년 5월 10일 자유총선거를 실시,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했다. 북위 38도선 분할이후 공산정권 수립을 꾸준히 준비해온 김일성은 같은해 38도선 북쪽지역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 과정에서 38도선을 사이에 둔 남북한은 좌우익으로 갈라져 신탁통치 찬성여부등을 둘러싸고 대립했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김구선생의 방북도 무위로 돌아갔다. 김일성은 이미 45년 12월 「민주기지론」을 내세워 남한을 해방돼야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6·25전쟁/50·6·25

50년 6월25일 새벽, 북한군의 전면적인 남한 공격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3년여동안 계속됐다. 압도적인 군사력의 북한군은 남침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대구 근방까지 파죽지세로 밀고왔다.

미국등 유엔군의 지원을 받은 한국군은 곧 반격을 시작, 인천상륙작전을 발판삼아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이 전쟁은 유엔군 참전과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반도 전역에서 치열하게 전개됐으며, 38선에 이어 휴전선이라는 새로운 분계선을 만들고 포성이 멎었다. 전쟁은 4백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포함한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냈으며 1천만명의 이산가족을 발생시켰다.

◎4·19혁명/60.4.19

4·19혁명은 48년 정부수립이후 12년간 계속되던 이승만독재정권의 막을 내리게함으로써 한국현대정치사의 새로운 이정표가 됐다.

4·19의 직접적 계기는 3·15 부정선거였다. 4월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 (당시 18세)군의 시신이 마산에서 발견된데 이어 4·19 하루전에는 국회의사당앞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던 고려대생들이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4월19일 학생·시민 10만명이 경무대앞까지 진출해 시위를 벌였고 경찰은 실탄사격으로 저지했으나 반정부시위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결국 이승만대통령은 4월26일 하야성명을 발표했고 4월28일에는 이기붕씨 일가가 집단자살했다.

◎5·16 군사쿠데타/61.5.16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무너진지 1년후 발생한 5·16 군사쿠데타는 이후 30여년간 한국현대정치사의 전면에 군이 등장하는 서곡이었다. 박정희 육군소장을 중심으로한 일단의 청년장교들은 몇차례의 거사계획 끝에 61년 5월16일 새벽 서울입성에 성공, 장면정권을 인수했다. 5·16 거사세력들은 혼란한 정치사회상황과 민생의 궁핍, 공산세력의 위협, 군의 부패를 일소함으로써 국가적 위기를 극복한다는 혁명의 명분을 걸고 반공을 국시로 삼았다. 4·19 혁명이 돌린 역사의 물줄기를 거스른 5·16은 박정희 장기정권으로 이어져 군사독재 속의 경제개발이라는 한국현대사의 모습을 그렸다.

◎박정희 서거/79.10.26

개발과 독재로 특징지워지는 유신시대 70년대는 79년 10월26일 개발독재의 기수, 박정희대통령이 궁정동안가에서 자신의 심복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살해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10·26사태의 발단은 그해 10월 4일 집권당인 공화당이 강력한 반정부투쟁을 주도하던 김영삼 당시 신민당총재의 의원직을 제명한 것이었다. 그러자 18일과 20일 잇따라 김총재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과 마산 창원등지에서 시위가 발생, 비상계엄과 위수령이 내려졌다. 박대통령 서거후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최규하대통령권한대행이 10대대통령에 선출됨으로써 유신시대가 종막을 고하게 됐다.

◎광주 민주화운동/80·5·18

광주민주화운동은 80년5월18일 당시 신군부의 계엄확대조치에 반발한 대학생들의 시위를 계엄군이 무력진압하면서 촉발됐다.

열흘동안 참혹한 민·군충돌은 2백40명(공식집계)의 사망·실종자를 냈다. 신군부는 광주의 비극을 계기로 정국을 완전장악한뒤 불과 석달여만에 5공정권을 출범시켰다.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왜곡됐던 광주민주화운동은 93년에야 비로소 공식적인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나 검찰은 최근 「성공한 쿠데타논」을 들어 당시 일련의 상황에 대한 법적 판단을 유보하고 책임자처벌을 포기함으로써 「광주」는 여전히 역사의 몫으로 남게됐다.

◎서울올림픽/88·9

88서울올림픽(9월17일∼10월2일)은 한민족의 무한한 역량과 잠재력을 국제사회에서 공인받은 민족 최대의 제전이었다. 서울올림픽에는 1백60개국 1만3천여명의 선수단이 출전, 사상 최대였고 국내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 사회구조 전반에 걸쳐 국제· 세계화의 거센 조류를 몰고왔다.

특히 이 대회는 동서의 냉전과 반목으로 80년 모스크바와 84년 LA올림픽이 반쪽대회로 치러진것과 달리 동서 양진영이 모두 참가, 동서해빙에 큰 기여를 했다. 한국은 이 대회서 금12 은10 동11개로 세계 4위의 쾌거를 이룩했다.

◎대소·중수교/90·9·30­92·8·24

90년 한·소수교에 이은 92년의 한·중수교는 노태우정부가 추진한 북방외교의 종착역이자 한국외교사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동서냉전체제의 붕괴라는 세계사적 흐름이 결정적 요인이었지만 우리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실이기도 했다.

이로써 한국은 한반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4대강국을 상대로 본격적인 통일외교를 펼칠 수 있게 됐다.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통해 평양으로」라는 구호가 실천단계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구소련의 붕괴를 미처 예상치못한 정부의 단견때문에 대소원조금 30억달러를 낭비했다는 비판을 낳기도했다.

◎김일성 사망/94·7·8

94년 7월8일 새벽2시 김일성북한주석이 사망했다. 45년 남북분단 이후 49년간 북한을 통치해온 김일성은 남한에서는 6·25동족상잔의 전범이었으나 북한에서는 신적 존재였다. 만주일대에서 항일 빨찌산활동을 벌였던 김일성은 소련을 등에 업고 북한에 등장, 조만식 박헌영 김두봉등을 제거하고 절대권력을 구축했다.

김일성은 자신의 아들 김정일에게 권력을 넘겨 부자세습 체제를 이루었다. 그의 사인과 사망장소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북한주민들은 그의 죽음에 집단히스테리와 같은 반응으로 온세계에 화제를 일으켰다. 김일성은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17일 앞두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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