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전남 진도서 입수… 청소중 발견/우리측·조총련 등서 반환요구… 남북쟁점 우려일본 홋카이도(북해도)대학의 연구시설내에 구한말당시 동학농민운동 지도자의 두개골이 방치돼 왔음이 확인돼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이 유골은 지난달 25일 대청소 도중 아이누족 유골 3개, 일본인 유골 1개, 출처불명 유골 1개와 함께 신문지에 싸여 골판지 상자에 들어있는 상태로 발견됐다.
유골에는 「한국 동학당… 사토 마사지로(좌등정차랑)로부터」라는 표찰이 붙어 있다. 또 그옆에는 편지지에 붓으로 「촉루(해골의 뜻) 메이지(명치)39년(1906년) 9월20일 진도에서」라는 제목밑에 입수 경위가 간단히 적혀 있다.
「메이지 27년(1894년) 한국에서 동학당의 봉기가 있었고 전라남도 진도에서 그들의 창궐이 극에 달했다. 동학당이 평정되면서 처형된 주도자 수백명의 시체가 길에 널렸고 수괴자는 효수됐다. 이 해골은 그중의 하나로 진도 시찰중 채집한 것이다」라는 경위와 「사토 마사지로(좌등정차랑)」라는 서명이 뚜렷하다.
홋카이도대학에 의하면 사토는 도쿠시마(덕도)현 출신의 사회교육가로 사범학교졸업후 도쿄의 철학자 아라이 오스이(신정오수)의 문하에 있었다. 그는 스승이 죽자 홋카이도의 하코다테(함관)에 정착, 교육자와 신문기자로 활동했고 장애자 교육과 사회교육에 힘을 쏟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의 유골은 사토가 30세때 식민지 조선을 방문한 길에 일본관리들과의 친분을 이용, 입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이 유골을 보관해 오다 한국정부수립(1948년) 이후 설명문을 써 각별한 교분관계를 유지해 온 홋카이도대학의 고고학자 나토리 다케미츠(명취무광)에게 유골을 넘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토가 입수경위에 「한국」「전라남도」등의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유골을 홋카이도대학에 넘긴 시점이 대한민국수립이후로 보이는 것이다.
유골이 발견되자 조총련측이 즉각 나섰다. 연구자를 삿포로(찰황)에 파견, 조사작업을 벌이는 한편 『반인도적 행위가 식민지배 이전부터 횡행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일본의 제국주의 행태를 비난하며 유골의 즉각적인 반환을 주장했다. 때마침 홋카이도지역을 시찰중이던 김태지 주일대사도 관심을 표명하고 학교측에 반환을 요구키로 했다. 한국대사관측은 금명 관계전문가를 홋카이도에 보내 정확한 진상을 조사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자칫 유골반환을 둘러싼 남북간의 쟁탈전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발견된 유골의 주인공인 동학운동 지도자의 정확한 처형시기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초기 동학운동이후 지하조직화 해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다 사토의 진도방문 직전인 1900년대초 처형됐다는 가설과 동학봉기 직후 처형돼 방치된 유골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엇갈리고 있다.
한편 홋카이도의 아이누 단체는 지난 6일 홋카이도대학에서 문제의 유골전체를 몰래 훔쳐냈다가 홋카이도대학측의 간절한 요청으로 되돌려 주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도쿄=황영식 특파원>도쿄=황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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