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론 “독립” 실제론 “분할” 거론/카이로·얄타·포츠담서 한반도 앞날 좌우한민족을 분단시킨 38선 획정은 급히 이루어졌지만 미국 영국 소련 중국등 2차대전 연합국 수뇌들의 한반도 분할논의는 일찍부터 있었다.
2차대전이 연합국측 승리로 굳어져가던 1943년말부터 강대국들은 잇따라 회담을 갖고 전후처리문제를 논의했다. 43년 11월 카이로회담, 45년 2월 얄타회담, 그리고 7월의 포츠담회담등은 겉으로는 한반도 독립을 논의하는 자리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한반도 분할공작의 현장이었다.
▷카이로회담◁
이런 가운데 43년 11월 22일부터 윈스턴 처칠 영총리,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대통령, 장제스(장개석) 중총통등 연합국 수뇌들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가졌다. 23일 하오 8시 루스벨트는 자신의 숙소에서 장총통과 만찬회동을 갖고 『한국등 식민지 장래문제에 대해 미중간 합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장총통은 한국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배석했던 홉킨스 미대통령 특별보좌관은 카이로선언문 초안에 「일본에 의한 한국민에의 반역적인 노예화를 우리는 유념하고 있고, 일본몰락후 가장 빠른 순간에 그 나라(한국)가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가 될 것임을 결의한다」는 문안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회담이 진행되면서 한국의 즉각 독립결의가 완화되는 쪽으로 초안이 수정됐다.수정안의 문안은 「가장 빠른 순간에(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대신 「알맞은 순간에(AT THE PROPER MOMENT)」로 후퇴했다. 이에 따라 27일 발표된 카이로선언문의 한국독립 관계문안은 「연합국 3대국은 한국민의 노예상태를 유념해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에 한국이 자유롭게 되는 것을 결의한다」로 최종 확정됐다.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연합국 최초의 공약이었던 이 선언문은 일본패전후 바로 독립될 수 있다고 믿어왔던 한국민들에게는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한국을 상당기간 위임통치 내지 신탁통치하겠다는 루스벨트의 복안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얄타회담◁
이같은 미국의 복안이 표면화한 것은 얄타회담때다.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 3거두는 45년 2월 4일 비밀리에 크림반도의 휴양도시 얄타에서 만났다. 회담 5일째인 8일 하오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관해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한국 신탁통치는 최소한 20∼30년정도 필요하다. 신탁통치는 미국 소련 중국 대표로 구성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이 때까지 한반도문제에 관해 「특별한」 준비를 하지 않고 있던 스탈린은 『한국의 신탁통치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말해 미국의 신탁통치안에 이견을 나타냈다.
이같은 입장차이로 얄타회담에서는 한반도 장래문제에 관해 서면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만 한반도의 신탁통치와 외국군 주둔에 대한 구두양해가 있었던 것만은 확실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얄타회담기간 열린 미소군사참모회의에서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지역을 침공하겠다는 군사작전안을 미국측이 양해함으로써 한반도 분할이 암시됐다. 미국측의 이 묵시적 동의는 45년 한반도 분할의 효시가 됐다.
▷포츠담회담◁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45년 7월 17일부터 트루먼 처칠 스탈린등이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은 주로 독일항복에 따른 전후처리와 아시아에서의 대일본 승전전략을 협의 조정하고, 종전에 따른 제반문제를 마무리하는 자리였다.
연합국 3국 수뇌들은 7월 26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일본본토를 완전 괴멸시킬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공표했다. 한반도문제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카이로선언을 재확인했을 뿐이다. 그러나 미국측은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공동신탁통치안을 제시했고, 별도로 열린 미소 참모총장회의에서는 소련측이 대일전 참전과 관련해 한반도 지상군 침공작전계획도를 미측에 넘겨주었다. 이 지도에는 북한 전역과 서울에까지 화살표가 그어져 있었다. 이에 놀란 미국측도 한반도에 미군을 진주시키는 작전계획을 서두르게 됐는데 이 것이 38선 획정의 계기가 됐다.<권대익 기자>권대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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