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야마정권 탄생 1등 공신/노동운동가 출신의 7선의원8일 단행된 일본의 내각개편은 국민으로부터 『무엇을 위한 개각인지 모르겠다』는 불만을 낳고 있다. 참의원선거에서 연립여당이 부진을 면치 못하자 민심수습차원에서 개각을 한다고 했지만 각료인선과정에서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총리와 고노 요헤이(하야양평)자민당총재간에 의견이 대립, 진통을 겪었고 결과적으로 민심수습과는 거리가 먼 당리당략적 인사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야당의 비난도 거세다.
이번 개각의 초점은 무라야마총리의 지도력을 발휘토록 하는 관방장관에 누가 앉느냐 하는 것과 자민당의 모리 요시로(삼희랑)간사장을 어느 포스트에 앉히느냐 하는 두가지로 집약됐다. 사회당측에선 건설장관이 이권과 관련된 부서여서 자민당이 차지하면 재계와의 유착관계가 재발한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고노총재의 간청으로 모리간사장에게 돌아갔다.
이에 따라 무라야마총리의 「안방역」이라고 할 수 있는 관방장관에 노사카 고켄(야판호현·70)건설장관이 수평이동됐다. 무라야마총리는 이가라시 고조(오십람광삼)관방장관과 노사카건설장관의 유임을 희망했지만 이가라시장관의 경우 『이번에 연임되면 호소카와정권때부터 3차례 연속 각료직을 맡는다』는 당내의 불평때문에 하차가 불가피하자 무라야마총리는 자신과 호흡이 잘맞는 노사카씨를 파트너로 택한 것이다.
무라야마 2기정권을 대변할 노사카관방장관은 돗토리(조취)현에서 중의원 7회연속 당선된 중진으로 돗토리현 총평(총평)의 사무국장을 4기, 총평의장을 3기 역임한 노동운동가 출신이다. 사회당의 중간좌파로 분류되는 노사카장관은 자민―사회 양당체제하에서는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93년 7월 자민당정권의 몰락으로 일본에 연립정권이 들어서면서 사회당좌파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특히 연립진영의 실질적인 리더였던 오자와 이치로(소택일랑)신생당 대표간사가 보수연합을 목표로 사회당과 사키가케를 제외시키려하자 자민당과의 비밀접촉을 통해 자민―사회―사키가케의 연립정권 구성으로 오자와에 일격을 가하면서 무라야마정권을 탄생시킨 1등공신이 됐다.
1기 무라야마내각이 출범할 때도 노사카는 관방장관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격무를 소화하기에는 건강에 자신이 없다』며 거절했는데 무라야마총리는 그후에도 『노사카가 옆에 없으면 내가 일을 할 수 없다』며 그를 측근에 두기를 희망해 왔다.
올곧은 성격의 소유자인 노사카는 각의에서 직언을 서슴지 않던 노나카 히로무(야중광무) 자치성장관 등 일부 자민당 각료의 유임을 무라야마총리에게 건의했지만 고노총재가 개인적인 이해관계로 이들을 모두 교체했기 때문에 고노총재에 반감을 품고 있다. 한번 한다면 하는 기질의 노사카관방이 고노총재에게 어떤 골탕을 먹일지가 관심사이다.<도쿄=이재무 특파원>도쿄=이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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