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따라 그은 선」 민족아픔으로/유래분분… “소견제 미서 결정”이 통설45년 8월15일은 우리민족에 광복의 날이면서 동시에 분단의 날이기도 하다. 광복과 함께 강요된 분단의 비극은 38선이라는 추상적 개념에서 비롯됐다. 원폭 두발로 항복한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미소연합군이 편의적으로 그은 지도상의 직선 하나가 우리민족을 반세기동안 갈라놓은 것이다.
학문적으로는 한반도분단의 배경을 놓고 여러갈래의 논쟁이 있다. 크게 보아 전통주의와 수정주의학설이 그것이다. 미국의 전통주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38선 획정은 거창한 역사적 의미와는 달리 의외로 간단하게 결정됐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을 처음부터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는 미국정부의 입장을 반영한 이 학설은 『2차대전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의 식민지인 한반도에 대한 강대국의 관심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수정주의학설은 38선 획정 자체의 우연성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소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38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결정되었는가에 관해서는 아직도 확고한 정설이 없다. 다만 연합국간의 사전협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미국의 단독결정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특히 일본의 항복이 예상보다 빨라 지리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던 미국이 소련의 한반도 「독식」을 막기위해 급히 38선을 그었다는 얘기다.
▷제1설◁
미국이 38선을 결정한 실무적 과정에 관해 널리 알려져있는 주장은 미 국무장관을 지낸 딘 러스크의 회고이다. 『찰스 본스틸대령과 나는 밤늦게까지 한반도 지도를 연구했다. 서울은 미국진영에 있어야만 할 것같았고 미육군이 광범위한 지역을 점령하는 것은 반대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지도를 펴놓고 우리는 서울 북쪽이 편리한 분계선이 될 것이라고 추정했으나 자연적·지리적인 경계선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38선을 추천하기로 결정했다. 국무성 육군성 해군성 3성조정위원회는 이 제안을 별 논쟁없이 받아들였는데 소련측에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 45년 당시 대령으로 육군성 전략정책단에 근무하던 러스크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들 두 대령에게 분할선 획정을 지시한 사람은 육군성 대표 링컨 소장으로 알려졌다.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링컨 소장은 45년 8월11일 3성조정위원회 던의장으로부터 『소련군이 남진한다』는 전화를 받고 두 대령에게 『서울과 인천이 포함되는 선에서 남북을 분할하라』고 지시했다. 두 사람은 30분만에 38선을 그어 링컨에 보고했다. 이 초안은 번즈 국무장관과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소련의 스탈린을 비롯한 연합국 수뇌들도 이의 없이 이를 승인했다. 최근에는 링컨 소장이 직접 38선을 그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렇게 결정된 38선은 연합군의 일반명령1호로 채택돼 8월15일 마닐라의 맥아더 태평양지역 연합군 최고사령관에게 시달됐다. 일반명령 1호는 38선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군에 항복하고 그 이남의 일본군은 미군에 항복할 것을 명하는 내용이었다.
▷제2설◁
이와는 전혀 다른 설도 있다. 미국의 마셜장군과 소련의 안토노프장군 사이에 동해안에서 미소해군의 충돌을 막기위한 작전관할권이 획정됐는데 그 선이 동해안 38도지점에서 시작됐고 이것이 육지로 연장됐다는 주장이다.
38선은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을 위한 방안이었지만 45년초 한때 독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 영국 소련 중국등 4개국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하는 방식이 검토되기도 했다.
이처럼 38선은 편의주의에 따라 실무자차원에서 결정됐지만 연합국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하려는 논의는 그 이전부터 있어왔다는 것이 통설이다. 45년 얄타회담이나 포츠담회담에서 38선이 결정됐다는 설도 있다. 이 자리에서는 강대국에 의한 한반도 신탁통치계획등 전후 한반도 처리문제도 논의됐다.
북위 38도. 위도를 나타내는 단순한 지리학적 개념의 이 수치는 우리민족에 50년간 단장의 슬픔을 안겨주었다. 어떠한 계기로 누가 금을 그었건 이제 38선은 우리 스스로가 지워야하는 숙제로 남아있다.<정광철 기자>정광철>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